2026년 3월 5일 목요일

[인생이야기] 새벽의 비보와 8남매의 통곡, 아버지를 보내던 고향 집 마당

[인생이야기] 새벽의 비보와 8남매의 통곡, 아버지를 보내던 고향 집 마당

1998년 그해 겨울, 아직 동이 트기도 전인 깊은 새벽이었습니다. 정적을 깨고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전화벨 소리에 제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전화를 받기도 전에 이미 몸이 먼저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예감은 무섭도록 정확했고, 수화기 너머 들려온 소식은 우리 8남매의 거대한 기둥이었던 아버지의 부고였습니다. 그 순간 제 세상은 멈춰버렸고, 새벽 공기는 가슴이 시리도록 차갑게 느껴졌습니다. 아버지가 평생을 일궈오신 고향 집 마당에 빈소가 차려지고, 우리 8남매는 모두 상복을 갈아입고 모여 앉아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우리 8남매에게 아버지는 단순히 부모 그 이상의 존재였습니다. 제가 7살 때 친엄마가 일찍 돌아가시고 새엄마와 함께 살아야 했던 굴곡진 인생 속에서도, 아버지는 흔들림 없는 우리의 등불이 되어주셨습니다. 그 모진 세월을 견디며 8남매를 모두 반듯하게 키워내신 아버지를 우리는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그랬기에 아버지를 보내드리는 마당은 8남매의 애틋한 통곡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며 쏟아내는 우리들의 울음소리는 아버지가 일궈오신 고단한 삶에 대한 감사이자, 다시는 볼 수 없는 아버지를 향한 슬픈 고백이었습니다.

장례 내내 우리들의 통곡만큼이나 처절했던 건 큰아버지의 절규였습니다. 큰아버지는 집안 어른으로서 당신 곁에 정성껏 묫자리까지 미리 장만해두셨기에, 아버지가 고집하신 화장을 완강히 반대하셨지요. 하지만 당신의 몹쓸 병마가 혹여나 자손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까 봐 "나는 화장을 해서 뿌려달라"던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화장을 마치고 한 줌 유골이 되어 돌아온 아버지를 보며, 큰아버지는 "내 동생을 불쏘시개 만들었다"며 아이처럼 서럽게 무너지셨습니다. 군 전체에 소문이 날 정도로 우애가 깊었던 형제였기에, 동생을 재로 만들어 돌아온 그 상황이 큰아버지께는 가슴을 에이는 고통이었을 겁니다.

아버지는 참으로 단단하면서도 여린 분이셨습니다. 항암 치료의 고통 속에서도 기운만 차리면 고향 바다로 달려가 새벽 초망을 던지시며 자식들의 안위를 빌던 분이셨지요. 그런 아버지가 당신의 유골을 반은 평생 그리워하던 엄마 산소에, 나머지 반은 투망을 치러 나갔던 그 바다에 뿌려달라고 하셨습니다. 유언에 따라 아버지의 유골을 고향 바다에 뿌리던 날, 파도 소리는 마치 아버지의 마지막 인사처럼 들려왔습니다. 푸른 물결 위로 아버지는 자유롭게 흩어지셨고, 나머지 절반은 엄마의 산소 곁에 모셔드렸습니다. 평생 혼자 자식들 키우며 엄마를 그리워하셨던 아버지가 이제야 비로소 평안을 찾으신 듯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무상함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간 동생을 그리워하며 동네가 떠나가라 우시던 큰아버지는, 그 서러운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신 건지 불과 3년 뒤 교통사고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묫자리를 나란히 쓰고 싶어 하셨던 그 간절한 소망을 뒤로한 채, 큰아버지마저 동생의 뒤를 따라가 버리신 겁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흘리셨던 그 뜨거운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전해진 큰아버지의 부고 소식에, 우리 8남매는 또 한 번 무너져 내렸습니다. 우애 깊던 두 형제의 이별이 이토록 짧고도 강렬한 마침표를 찍을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버지, 그리고 큰아버지. 이제는 하늘에서 두 분이 나란히 앉아 웃고 계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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