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고부갈등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고부갈등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6년 3월 4일 수요일

[인생이야기] 대기업 다니는 남편과 아반떼 새 차, 그 평탄함 속에 감춰둔 속마음

 

[인생이야기] 대기업 다니는 남편과 아반떼 새 차, 그 평탄함 속에 감춰둔 속마음

대기업 남편과 맞벌이로 일궈낸 경제적 안정

그 당시 우리 집 형편은 겉으로 보기에 제법 안정적이었습니다. 남편은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고, 시어머니께서 집에서 아이를 봐주셨기에 저도 마음 놓고 밖에서 돈을 벌 수 있는 환경이었지요. 남편은 밖에서 성실히 직장 생활을 하고, 저 또한 홈패션 가게에서 밤낮없이 주문을 받아 부지런히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둘이서 열심히 맞벌이를 한 덕분에 경제적으로는 크게 부족함이 없는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생애 첫 새 차 '아반떼'와 남들의 부러움

그 무렵 현대자동차에서 '아반떼'라는 차가 처음 출시되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우리 부부도 그 흐름에 맞춰 생애 첫 새 차로 아반떼를 한 대 뽑았습니다. 반짝이는 새 차를 마당에 세워두고 보니, 8남매 중 일곱째로 자라며 고생했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며 감회가 참 새로웠습니다. 남들 눈에는 대기업 다니는 남편에, 기술 가진 아내, 그리고 귀한 손주를 봐주시는 시어머니까지 계시니 참 복 많은 집안이라 불릴 만한 시절이었습니다.

겉모습과 달리 마음 한구석에 쌓이던 스트레스

하지만 집안 형편이 조금씩 피어나고 살림살이가 나아진다고 해서 제 마음까지 마냥 편안했던 것은 아닙니다. 밖에서 보기엔 평온한 가정이었지만, 저는 저대로 말 못 할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시어머니와 한 지붕 아래 살며 아이를 맡기고 장사를 나가는 일은,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늘 조심스럽고 어려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내 아이를 내 손으로 오롯이 키우지 못한다는 미안함과 고부간의 미묘한 갈등은 퇴근 후에도 저를 짓누르는 큰 짐이었습니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감내해야 했던 시간들

남편은 직장 생활에 충실하며 집안이 화목하게 돌아가는 것에 만족해했지만, 저는 가게 일과 집안일 사이에서 늘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홈패션 가게에 앉아 재봉틀을 돌리면서도 머릿속은 늘 집안 걱정과 아이 걱정으로 가득 찼습니다. 겉으로는 새 차를 타고 다니며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하는 듯 보여도, 속으로는 그 안정감을 유지하기 위해 제가 혼자 감내해야 했던 정신적인 피로감이 상당했던 시기였습니다.

35년 자영업 인생의 한 페이지를 돌아보며

35년 자영업 인생을 돌이켜보면, 그때처럼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가 가장 평탄해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 단순히 돈이 모이고 좋은 차를 탄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더군요. 남편의 대기업 월급과 제가 번 돈으로 살림은 윤택해졌을지언정, 제 마음 한구석에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스트레스가 켜켜이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의 담담한 기록들이 이제는 제 인생의 소중한 한 페이지가 되어 이렇게 글로 남게 되었습니다.

2026년 3월 3일 화요일

좁은 아파트, 네 아이의 울음소리와 참아내야 했던 한숨

좁은 아파트, 네 아이의 울음소리와 참아내야 했던 한숨

둘째를 낳고 한 달 만에 홈패션 가게로 돌아온 제 일상은 그야말로 전쟁터였습니다. 당시 친정아버지는 수술 후 대구 언니 집에서 항암 치료를 받으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계셨습니다. 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아버지의 부재는 제 마음을 텅 비게 만들었지만, 슬퍼할 겨를도 없이 저를 기다리는 건 숨 막히는 집안 현실이었습니다. 남편의 고집으로 모셔온 시어머니와의 합가는 상상 이상의 스트레스였고, 갓 해산한 몸으로 시어머니 눈치를 보며 살림을 챙겨야 했던 그 시간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듯 위태로웠습니다.

무엇보다 저를 미치게 했던 건 집안을 가득 채운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이었습니다. 우리 집에는 이제 겨우 여섯 살 된 큰애와 갓난쟁이 둘째가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던 시누이는 자기 집 애들 둘을 시도 때도 없이 저희 집에 맡기곤 했습니다. 좁은 아파트 거실은 순식간에 아이 셋, 네 명의 울음소리와 장난감으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내 아이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산달에, 조카들까지 줄줄이 떠맡게 된 현실이 참으로 가혹했습니다. 낮에는 가게에서 재봉틀과 씨름하고, 밤에는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넋이 나간 채 하루를 버텨야 했습니다.

워낙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잘 참는 성격이라 겉으로는 묵묵히 그 소란을 다 받아냈지만, 제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습니다. 가게에서 손님들 이불을 지으며 온종일 기운을 다 빼고 녹초가 되어 돌아와도, 집은 편히 쉴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시어머니는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고생하신다며 제가 오기만을 기다리셨고, 저는 앞치마를 벗기도 전에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 저녁을 짓고 아이들을 씻겨야 했습니다. 시누이는 같은 단지에 살면서도 미안한 기색 없이 아이들을 맡겼고, 저는 거절 한마디 못 한 채 그 무거운 짐을 다 짊어졌습니다. 제 몸 하나 추스를 틈 없이 남의 집 아이들까지 돌보며 북적거리는 거실 한복판에 서 있을 때면, 지독한 외로움이 밀물처럼 밀려오곤 했습니다.

그 시절 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남편의 무심함이었습니다. 집안이 아이들 소리로 시끌벅적하니 남편은 그저 '사람 사는 집 같다'며 허허거렸지만, 그 소란을 지키기 위해 제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삼키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시어머니와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생겨도, 시누이네 아이들 때문에 제 아이가 뒷전으로 밀려나도 저는 그저 '내가 조금 더 고생하고 말지' 하는 마음으로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대구에서 투병 중이신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집안 시끄럽게 불평을 늘어놓을 수는 없었기에, 그 모든 화와 스트레스를 가슴 깊은 곳에 꾹꾹 눌러 담으며 버텼습니다. 꾹 참는 것이 미덕이라 믿었던 그 성미가 그때는 제 스스로를 갉아먹는 독이 되고 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모진 세월을 어떻게 견뎠나 싶습니다. 대구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걱정과 시어머니와의 불편한 동거, 그리고 내 아이와 조카들까지 뒤엉킨 그 아수라장 속에서 저는 엄마라는 이름 하나로 그 모든 풍파를 온몸으로 막아냈습니다. 35년 장사 인생 중 가장 어둡고 긴 터널 같았던 그 시절, 차가운 재봉틀 소리만이 제 서러운 마음을 알아주는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비록 제 젊음은 그렇게 희생과 인내로 채워졌지만, 그 시절의 모진 바람을 견뎌냈기에 지금의 제가 이토록 단단해질 수 있었음을 이제는 압니다. 그 북적이는 소란 속에서도 기어이 가정을 지켜낸 제 자신이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론 참 가슴이 아릿해 옵니다.

2026년 3월 1일 일요일

내 손으로 키우고 싶었던 꿈과 재봉틀 소리에 묻어둔 서러움

 

내 손으로 키우고 싶었던 꿈과 재봉틀 소리에 묻어둔 서러움

둘째 딸의 탄생은 제게 너무나 소중하고 간절한 기회였습니다. 8남매 중 일곱째로 자라며 늘 따뜻한 엄마의 품이 그리웠던 제게, 내 아이를 온전히 내 손으로 키울 수 있다는 것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꿈이었지요. 이번만큼은 내가 직접 고운 천을 골라 포근한 이불을 지어 아이를 입히고, 쌔근쌔근 잠든 아이의 숨소리를 온종일 곁에서 지켜보며 키우고 싶었습니다.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내 온기를 아이에게 오롯이 나누어주는 것, 엄마로서 그 당연하고 소박한 행복을 누려보는 것이 제게는 인생의 가장 큰 소원이었습니다. 하지만 냉정한 현실은 그 작은 바람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제 간절한 마음을 헤아려주기는커녕, 산후조리도 채 끝나지 않은 저를 다그치며 하루라도 빨리 홈패션 가게로 복귀하기만을 바랐습니다. 갓 해산한 몸은 찬바람만 스쳐도 뼈마디가 시려 왔지만, 남편의 눈에는 밀려드는 주문과 가게 운영이 먼저였나 봅니다. 아이의 보드라운 살결을 비비며 젖을 물려야 할 시기에, 저는 가게의 서늘한 천 먼지와 삭막한 재봉틀 소리를 먼저 마주해야 했습니다. 가게 문을 열 때마다 느껴지던 그 차가운 공기는 제 서러운 마음을 더욱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엄마로서 아이 곁을 지키고 싶었던 제 간절한 소망은 그렇게 남편의 완강한 고집 앞에 속절없이 꺾여버렸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남편이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시어머니를 저희 집으로 모셔온 일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봐주실 테니 저는 집안일이나 육아 걱정 말고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데만 전념하라는 식이었지요. 하지만 시어머니와 한집에 살며 아이를 맡기고 장사를 나가는 일은 제게 지독한 스트레스였습니다. 내 아이인데도 내 마음대로 안아주거나 얼러주지 못하고, 살림살이 하나하나 시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던 그 시간은 숨이 막힐 듯한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가게에서 일을 하다가도 집에서 아이가 울고 있지는 않을지, 시어머니가 불편해하시지는 않을지 걱정하느라 제 마음은 단 한 순간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홈패션 가게에 앉아 차가운 재봉틀 앞에 앉아 있을 때면, 손님들의 이불을 지으면서도 제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습니다. 다른 집 아이들이 덮을 포근한 침구는 정성껏 만들면서 정작 내 아이는 남의 손에 맡겨두고 온 현실이 너무나 비참해 재봉틀 소리에 맞춰 남몰래 울기도 참 많이 울었습니다. 35년 자영업 인생 중 그때만큼 몸과 마음이 고달팠던 적이 없었습니다. 엄마로서의 권리마저 빼앗긴 채 그저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기계가 된 것만 같은 서러움에, 앞치마 끈을 조여 맬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시려 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제 속사정은 아랑곳없이 세상은 무심히도 흘러갔습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들은 남편의 속마음은 저를 더욱 허탈하게 만들었습니다. 남편은 나중에야 그때가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웠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하더군요. 본인의 어머니가 아이를 봐주시고 아내는 밖에서 착실히 홈패션 장사를 해오니, 집안이 화목하고 경제적으로도 부족함 없다고 느꼈다는 것입니다. 제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서러워했던 것, 시어머니 눈치를 보며 숨죽여 지냈던 그 고통은 꿈에도 모른 채 본인만 행복했다고 말하는 남편이 너무나 야속해 한동안 가슴이 먹먹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가장 따뜻했던 기억이, 그 시간을 온몸으로 버텨낸 제게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서러운 멍울이 된 셈입니다.

이 모든 마음의 짐 속에서 저를 더 아프게 했던 건 바로 친정아버지의 소식이었습니다. 평생 그토록 판소리를 좋아하고 잘하시던 우리 아버지는, 하필 제가 이 모진 풍파를 겪던 시기에 수술을 받으셨고 그와 동시에 영영 목소리를 잃으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소리가 끊긴 그 적막한 고통과 아이를 직접 키우지 못하는 미안함을 동시에 짊어진 채, 억척스럽게 재봉틀을 돌려야만 했습니다. 다시는 아버지의 구성진 판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슬픔이 가슴을 후벼 팠지만, 저는 울음을 삼키며 가정을 지키기 위해 가게를 지켰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서러움은 흉터처럼 남았지만 그 모진 세월을 견디며 지켜낸 이 소중한 가족들이 있기에 오늘도 저는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며 살아갑니다.

2026년 2월 27일 금요일

[인생이야기] 8월의 뙤약볕보다 뜨거웠던 눈물, 서러운 산후조리의 기록

 

[인생이야기] 8월의 뙤약볕보다 뜨거웠던 눈물, 서러운 산후조리의 기록

둘째 아이를 낳고 집에서 몸조리를 하던 그해 8월은 유독 무덥고 길었습니다. 가만히 누워 있어도 땀이 흐르는 삼복더위 속에 갓 난 아이를 안고 돌아온 집은 축복보다는 견디기 힘든 인내의 공간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시설 좋은 산후조리원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집에서 시어머니의 산바라지를 받았지만, 그 시간은 따뜻한 돌봄보다는 소외감과 서러움의 연속이었습니다. 7살에 엄마를 여읜 일곱째 딸에게 친정엄마 없는 산방은 뙤약볕보다 더 시리게 다가왔고, 저는 제 집 안방에서도 마음 편히 누워 있지 못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아들만 귀히 여겼던 시어머니와 효자 남편 사이의 소외감

시어머니께서는 대기업에 다니는 당신 아들을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로 여기셨습니다. 첫째 때와 마찬가지로 집으로 오셔서 산바라지를 해주셨지만, 시어머니의 모든 관심과 정성은 오로지 아들에게만 향해 있었습니다. 남편 또한 유독 효심이 깊어 퇴근 후면 시어머니 곁에 붙어 앉아 온갖 집안 사정과 속상한 이야기들을 미주알고주알 다 받아주었습니다. 모자 사이의 살가운 대화가 거실을 가득 채우는 동안, 방 안에 홀로 누워 있던 저는 철저히 소외되었습니다. 남편이 산모인 제 마음을 먼저 헤아려주기보다 어머니의 말 상대가 되어주는 것을 보며, 저는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외로움을 삭여야 했습니다.

방문 너머로 들리는 며느리 흉, 나를 만만하게 본 기막힌 처사

그 무더운 여름날, 저를 가장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은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거실에 나란히 앉아 나누는 대화였습니다. 제가 방 안에 누워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마치 제가 없는 사람인 양 제 흉을 보곤 했습니다. "산후조리해주러 왔으면서도 이런 건 지가 해도 될 텐데 꼼짝도 않는다"며 산모인 제 살림이나 태도를 비꼬는 말들이 방문을 넘어 선명하게 꽂혔습니다. 들으라고 일부러 하는 그 무례한 말들은 저를 얼마나 만만하게 보고 무시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막힌 처사였습니다. 시어머니는 효자 아들의 유세를 등에 업고 기세등등하셨고, 저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까지 짓밟히는 기분이 들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안하무인 시누이와 똑부러지게 말 못 했던 바보 같은 인내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며 제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시누이 또한 저를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성격이 유별나고 안하무인이었던 시누이는 시어머니의 유세에 장단을 맞추며 제 자존감을 깎아내렸습니다. 요즘 세대 사람들처럼 자기주장을 똑부러지게 하고 "남의 흉을 보려면 나가서 보라"고 당당히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저는 워낙 내성적인 탓에 그저 묵묵히 참는 것밖에 할 줄 몰랐습니다. 기가 막히고 기분 나쁜 소리를 들어도 행여나 집안이 시끄러워질까 봐 입을 굳게 닫고 살았던 제가 참 바보 같았습니다. 친정엄마가 계셨더라면 제 편이 되어 이 모진 소리들을 막아주셨을 텐데 싶어, 밤마다 갓 난 아이를 안고 소리 없이 눈물을 삼켰습니다.

묵묵히 견뎌낸 서러움이 남긴 삶의 맷집과 오기

돌아보면 그 시절의 저는 참으로 미련할 만큼 참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 지독한 소외감과 대놓고 무시당하던 경험은 역설적으로 저를 강하게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못 하고 묵묵히 견뎌내던 그 인내심은 훗날 제가 35년 넘게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단단한 맷집이 되었습니다. 비록 과정은 서러웠지만, 그 고통을 뚫고 지나온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똑부러지지 못해 서러웠고, 남편이 원망스러워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참아야 했던 이 사실적인 기록이 저와 비슷한 길을 걸어온 누군가에게 작은 공감과 다시 일어설 용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서른아홉 늦둥이의 온기, 그리고 한 달 만에 마주한 차가운 현실

 막둥이를 낳고 이번만큼은 제대로 된 휴식을 꿈꿨습니다. 서른아홉이라는 늦은 나이에 찾아온 귀한 생명이었기에, 앞선 두 딸을 낳고 몸조리도 못한 채 일터로 달려가야 했던 그 서러운 세월을 보상받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야속하게도 이전과 똑같이 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