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23일 월요일

[인생이야기] 35년의 인내, 나를 지우고 남편의 그림자로 살았던 세월

 

[인생이야기] 35년의 인내, 나를 지우고 남편의 그림자로 살았던 세월

인생의 절반 이상을 장사꾼으로, 어머니로 살아오며 제 이름 석 자보다 '누구의 엄마', '사장님'으로 불리는 것이 익숙했습니다. 밖에서는 15년 홈패션과 20년 식당을 운영하며 거친 풍파를 다 이겨낸 여장부 소리를 들었지만, 정작 집 안에서는 남편의 독단과 이기심 앞에 숨죽여야 했던 초라한 아내였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 위주로 돌아가야 하고, 자식도 아내도 본인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믿는 남편 곁에서 저는 35년이라는 긴 세월을 영혼이 깎여나가는 기분으로 버텼습니다. 존중받지 못하는 삶이 얼마나 외롭고 처절한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가장 잊을 수 없는 상처는 늦둥이 아들이 찾아왔을 때였습니다. 앞선 두 아이를 낳고 몸조리도 못한 채 차가운 원단 더미 사이에서 미싱 페달을 밟았던 한을 이번만큼은 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5년 정들었던 홈패션 가게를 정리하고 권리금 계약까지 마쳤는데, 남편은 본인의 욕심 때문에 그 소중한 계약을 자기 멋대로 파기해 버렸습니다. 아내가 겪을 신체적 고통이나 간절한 소망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뜻대로 상황이 돌아가야 한다는 그 이기심이, 한 여자가 평생 꿈꿔온 마지막 휴식과 엄마로서의 시간을 무참히 짓밟아 버린 것입니다.

남편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황혼기에 접어들었음에도 여전히 모든 결정권은 본인에게 있어야 하고, 가족들은 그저 자신의 뒤를 따르는 존재로 여깁니다. 제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욕설이 섞인 거친 말투와 나를 한 명의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는 그 천박한 태도였습니다. 넉넉지 못한 형편이었어도 바른 마음으로 자라온 제게, 남편의 강압적인 방식은 매일매일이 영혼의 고문과도 같았습니다. 아이들의 울타리를 지켜주겠다는 일념 하나로 35년을 참았지만, 돌아보니 남은 것은 가슴 시린 후회와 텅 빈 마음뿐입니다.

제가 이혼을 꿈꾸는 이유는 거창한 행복을 바라서가 아닙니다. 그저 남은 생만이라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나 자신을 존중하며 평온하게 숨 쉬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 말이 무시당하지 않고, 내 결정이 존중받는 평범한 일상이 제게는 평생 가닿지 못한 꿈이었습니다. 35년 장사 끝에 남은 것은 굽은 손마디와 고단한 몸뿐인데, 남편은 여전히 저의 희생을 당연한 권리처럼 생각합니다. 이제는 저를 묶어두었던 그 지독한 모성애라는 족쇄를 내려놓고, '착한 바보'로 살았던 지난날의 저를 안아주고 싶습니다.

블로그에 이 아픈 속내를 털어놓는 것은, 저와 같은 길을 걷고 있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는 것이 능사가 아니며,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 곁에서 자신을 죽이며 사는 것은 결코 미덕이 아닙니다. 인생은 생각보다 짧고, 나 자신보다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는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곳에서는 과감히 발길을 돌리시길 바랍니다. 부디 여러분은 저처럼 인생의 끝자락에서 지난날을 가여워하며 눈물짓지 마시고, 지금 이 순간 여러분 자신을 가장 많이 아끼며 사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2026년 3월 16일 월요일

[인생이야기] 35년을 참고 살아보니, 남은 것은 가슴 시린 후회뿐이었습니다

 

[인생이야기] 35년을 참고 살아보니, 남은 것은 가슴 시린 후회뿐이었습니다

인생 황혼기에 접어들어 지나온 세월을 가만히 돌이 보니,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듯 허망하고 그저 후회스러운 마음뿐입니다. 밖에서는 15년 홈패션, 20년 식당을 운영하며 거친 세상 풍파 다 이겨낸 여장부 사장님 소리를 들었지만, 정작 집 안에서는 나 자신을 지키지 못한 채 그저 무시당하고 험한 말을 들어도 입술만 깨물며 버텼던 바보 같은 세월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나 자신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고 남을 위해 죽이며 살았는지, 이제야 그게 너무나 뼈아픈 회한으로 남습니다.

언젠가 TV에서 한 유명 아나운서가 이혼을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을 고백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첫째를 낳고 참다가 결국 둘째까지 낳고 나서야 결단을 내렸다는 그녀의 말에,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왜 진작 안 했냐, 왜 둘째까지 낳아서 고생을 자초했느냐"고 묻더군요. 그 무심한 질문이 제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았습니다. 남들은 절대 이해 못 할 그 속사정을 저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딸 둘을 낳고도 그 지옥 같은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결국 셋째인 늦둥이 아들까지 낳으며 무려 35년을 버텼던 사람입니다.

저는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어도, 집안에서 욕설 한마디 듣지 않고 바른 마음으로 자랐습니다. 그런 제게 화가 나면 입버릇처럼 욕부터 내뱉는 남편과 거친 말이 일상인 시댁의 분위기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영혼의 고문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욕설이 많이 나오는 한국 영화는 아예 보지도 않을 정도로 거친 말에 진저리를 칩니다. 하지만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엄마를 여의고 그 시린 서러움을 뼈저리게 겪어본 저는, 내 아이들에게만큼은 절대로 그 외로움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 영혼이 가루가 되는 한이 있어도 아이들의 울타리는 지켜내겠다는 그 지독한 모성애가 저를 35년이나 묶어두는 족쇄가 되었습니다.

내가 한 번 참으면 집안이 조용해질 것이고, 내 아이들은 평온하게 공부할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렇게 지독하게 참으며 딸들은 선생님으로, 박사로 번듯하게 키워냈고 늦둥이 아들도 이제 제 앞가림하는 학생으로 자랐습니다. 자식 농사 잘 지은 게 유일한 훈장이라 생각하며 위안을 삼아보려 하지만, 문득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은 너무나 가엽고 눈물겹습니다. 내가 참으니 남들은 너무나 편안해했고, 저의 그 피눈물 나는 희생을 어느샌가 너무나 당연한 권리처럼 생각하더군요. 35년 장사 끝에 남은 건 굽은 손마디와 고단한 몸뿐인데, 정작 '나'라는 사람은 어디에도 흔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블로그에 이런 아픈 속얘기를 구구절절 남기는 이유는, 이 글을 보는 젊은 세대들은 저처럼 '착한 바보'로 살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큰소리 안 나게 참으며 사는 것이 결코 정답이 아닙니다.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 입만 열면 욕설을 내뱉는 천박한 환경에서 "아이들 때문에 한 번만 더 참자"고 자신을 다독이지 마십시오. 그 참음 끝에는 보람이 아니라 지독한 후회만 남을 뿐입니다.

인생은 생각보다 짧고, 나 자신보다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는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고,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곳에서는 과감히 발길을 돌리십시오. 부디 여러분은 저처럼 인생의 끝자락에서 지난날을 가여워하며 눈물짓지 마시고, 지금 이 순간 여러분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많이 아끼고 사랑하며 사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2026년 3월 9일 월요일

 

친정아버지 장례식날의 서러움, 나는 진심으로 이혼하고 싶었다

내 나이 일곱 살에 엄마를 여의고 8남매 중 일곱째로 자라며 아버지는 내게 세상의 전부와 같았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남편과 시어머니는 단호하게 앞을 막아섰습니다. 당시 일곱 살, 세 살배기였던 우리 딸들을 절대 데려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려서 안 된다는 그 한마디에 핏덩이 같은 자식들을 떼어놓고 혼자 고향으로 향하며, 나는 이 집구석과는 더 이상 인연을 이어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친정아버지 가시는 길에 내 자식들 인사도 못 시키게 하는 그 처사가 너무나 야속하고 기가 막혀, 내려가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고향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본 광경은 내 가슴을 더 후벼팠습니다. 내 동생네 아이들은 우리 딸들보다 더 어렸는데도 다 같이 와서 외할아버지 영정 앞에 엎드려 절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데 "왜 내 자식들만 저 자리에 없나" 싶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상주로서 아버지 곁을 지키며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해야 하는 그 귀한 시간조차, 내 아이들만 쏙 빼놓고 온 그 서러움이 가슴에 단단한 멍으로 남았습니다. 35년 장사하며 험한 일 많이 겪었지만, 가장 슬퍼해야 할 자리에서조차 내 자식들 때문에 죄인처럼 가슴을 졸여야 했던 그때만큼 내가 초라하고 무시당한다고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내 슬픔은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장사한다는 핑계로,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살아생전 아버지께 더 자주 찾아가지 못했던 것이 가슴에 사무치게 후회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잘해드릴걸,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더 챙겨드릴걸 하는 마음에 매 순간 아버지 생각만 나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남편과 시어머니는 그런 나의 애도조차 싫어했습니다. "언제까지 울고 있을 거냐"는 식의 싸늘한 시선 속에서 나는 내 아버지를 잃은 슬픔조차 죄인처럼 숨어서 삭여야 했습니다. 내 부모를 잃은 정당한 슬픔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 집안의 분위기에 나는 진심으로 이혼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무도한 행동의 뿌리에는 평소 시어머니가 입에 달고 살던 무시가 깔려 있었습니다. 친정에 다녀오면 어른들 안부를 묻기는커녕, 경상도 사투리로 "늘기들 잘 있~다~?(늙은이들 잘 있더냐?)"라 부르며 아래로 보던 그 심보가 있었기에, 장례식 날에도 내 자식들의 도리마저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그때 왜 당당하게 "말씀 좀 가려서 하세요"라고 따지지 못했는지, 그 침묵했던 순간들이 62세가 된 지금까지도 자다가 벌떡 일어날 만큼 분하고 억울합니다. 너무 기가 막혀서 "네에~?" 하고 되물으면 그제야 "아니 그냥 잘 있더 


친정아버지 장례식날의 서러움, 나는 진심으로 이혼하고 싶었다

내 나이 일곱 살에 엄마를 여의고 8남매 중 일곱째로 자라며 아버지는 내게 세상의 전부와 같았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남편과 시어머니는 단호하게 앞을 막아섰습니다. 당시 일곱 살, 세 살배기였던 우리 딸들을 절대 데려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려서 안 된다는 그 한마디에 핏덩이 같은 자식들을 떼어놓고 혼자 고향으로 향하며, 나는 이 집구석과는 더 이상 인연을 이어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친정아버지 가시는 길에 내 자식들 인사도 못 시키게 하는 그 처사가 너무나 야속하고 기가 막혀, 내려가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고향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본 광경은 내 가슴을 더 후벼팠습니다. 내 동생네 아이들은 우리 딸들보다 더 어렸는데도 다 같이 와서 외할아버지 영정 앞에 엎드려 절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데 "왜 내 자식들만 저 자리에 없나" 싶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상주로서 아버지 곁을 지키며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해야 하는 그 귀한 시간조차, 내 아이들만 쏙 빼놓고 온 그 서러움이 가슴에 단단한 멍으로 남았습니다. 35년 장사하며 험한 일 많이 겪었지만, 가장 슬퍼해야 할 자리에서조차 내 자식들 때문에 죄인처럼 가슴을 졸여야 했던 그때만큼 내가 초라하고 무시당한다고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내 슬픔은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장사한다는 핑계로,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살아생전 아버지께 더 자주 찾아가지 못했던 것이 가슴에 사무치게 후회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잘해드릴걸,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더 챙겨드릴걸 하는 마음에 매 순간 아버지 생각만 나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남편과 시어머니는 그런 나의 애도조차 싫어했습니다. "언제까지 울고 있을 거냐"는 식의 싸늘한 시선 속에서 나는 내 아버지를 잃은 슬픔조차 죄인처럼 숨어서 삭여야 했습니다. 내 부모를 잃은 정당한 슬픔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 집안의 분위기에 나는 진심으로 이혼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무도한 행동의 뿌리에는 평소 시어머니가 입에 달고 살던 무시가 깔려 있었습니다. 친정에 다녀오면 어른들 안부를 묻기는커녕, 경상도 사투리로 "늘기들 잘 있~다~?(늙은이들 잘 있더냐?)"라 부르며 아래로 보던 그 심보가 있었기에, 장례식 날에도 내 자식들의 도리마저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그때 왜 당당하게 "말씀 좀 가려서 하세요"라고 따지지 못했는지, 그 침묵했던 순간들이 62세가 된 지금까지도 자다가 벌떡 일어날 만큼 분하고 억울합니다. 너무 기가 막혀서 "네에~?" 하고 되물으면 그제야 "아니 그냥 잘 있더냐고" 꼬리를 흐리던 그 모습이 떠올라 자꾸만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이 장사 밑천 빼듯 쉽지 않았던 것은 오로지 아이들 때문이었습니다. 일곱 살, 세 살 된 아이들이 눈에 밟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7살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고 외롭게 자랐던 내 어린 시절의 아픔을 내 아이들에게만은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책임감이, 당장이라도 갈라설 것 같던 내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억척스럽게 살아온 35년 세월이 헛되지 않았음을 박사가 된 딸과 번듯한 아들을 보며 느낍니다. 이 블로그에 내 인생의 아픈 조각들을 적어 내려가는 것은, 그때 억눌렸던 서러움을 이제라도 세상 밖으로 뱉어내어 위로받기 위함입니다. 62세 장사꾼 엄마의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2026년 3월 5일 목요일

[인생이야기] 새벽의 비보와 8남매의 통곡, 아버지를 보내던 고향 집 마당

[인생이야기] 새벽의 비보와 8남매의 통곡, 아버지를 보내던 고향 집 마당

1998년 그해 겨울, 아직 동이 트기도 전인 깊은 새벽이었습니다. 정적을 깨고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전화벨 소리에 제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전화를 받기도 전에 이미 몸이 먼저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예감은 무섭도록 정확했고, 수화기 너머 들려온 소식은 우리 8남매의 거대한 기둥이었던 아버지의 부고였습니다. 그 순간 제 세상은 멈춰버렸고, 새벽 공기는 가슴이 시리도록 차갑게 느껴졌습니다. 아버지가 평생을 일궈오신 고향 집 마당에 빈소가 차려지고, 우리 8남매는 모두 상복을 갈아입고 모여 앉아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우리 8남매에게 아버지는 단순히 부모 그 이상의 존재였습니다. 제가 7살 때 친엄마가 일찍 돌아가시고 새엄마와 함께 살아야 했던 굴곡진 인생 속에서도, 아버지는 흔들림 없는 우리의 등불이 되어주셨습니다. 그 모진 세월을 견디며 8남매를 모두 반듯하게 키워내신 아버지를 우리는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그랬기에 아버지를 보내드리는 마당은 8남매의 애틋한 통곡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며 쏟아내는 우리들의 울음소리는 아버지가 일궈오신 고단한 삶에 대한 감사이자, 다시는 볼 수 없는 아버지를 향한 슬픈 고백이었습니다.

장례 내내 우리들의 통곡만큼이나 처절했던 건 큰아버지의 절규였습니다. 큰아버지는 집안 어른으로서 당신 곁에 정성껏 묫자리까지 미리 장만해두셨기에, 아버지가 고집하신 화장을 완강히 반대하셨지요. 하지만 당신의 몹쓸 병마가 혹여나 자손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까 봐 "나는 화장을 해서 뿌려달라"던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화장을 마치고 한 줌 유골이 되어 돌아온 아버지를 보며, 큰아버지는 "내 동생을 불쏘시개 만들었다"며 아이처럼 서럽게 무너지셨습니다. 군 전체에 소문이 날 정도로 우애가 깊었던 형제였기에, 동생을 재로 만들어 돌아온 그 상황이 큰아버지께는 가슴을 에이는 고통이었을 겁니다.

아버지는 참으로 단단하면서도 여린 분이셨습니다. 항암 치료의 고통 속에서도 기운만 차리면 고향 바다로 달려가 새벽 초망을 던지시며 자식들의 안위를 빌던 분이셨지요. 그런 아버지가 당신의 유골을 반은 평생 그리워하던 엄마 산소에, 나머지 반은 투망을 치러 나갔던 그 바다에 뿌려달라고 하셨습니다. 유언에 따라 아버지의 유골을 고향 바다에 뿌리던 날, 파도 소리는 마치 아버지의 마지막 인사처럼 들려왔습니다. 푸른 물결 위로 아버지는 자유롭게 흩어지셨고, 나머지 절반은 엄마의 산소 곁에 모셔드렸습니다. 평생 혼자 자식들 키우며 엄마를 그리워하셨던 아버지가 이제야 비로소 평안을 찾으신 듯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무상함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간 동생을 그리워하며 동네가 떠나가라 우시던 큰아버지는, 그 서러운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신 건지 불과 3년 뒤 교통사고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묫자리를 나란히 쓰고 싶어 하셨던 그 간절한 소망을 뒤로한 채, 큰아버지마저 동생의 뒤를 따라가 버리신 겁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흘리셨던 그 뜨거운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전해진 큰아버지의 부고 소식에, 우리 8남매는 또 한 번 무너져 내렸습니다. 우애 깊던 두 형제의 이별이 이토록 짧고도 강렬한 마침표를 찍을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버지, 그리고 큰아버지. 이제는 하늘에서 두 분이 나란히 앉아 웃고 계시겠지요? 

2026년 3월 4일 수요일

 

번듯한 새 아파트라는 화려한 감옥, 그 안에서 홀로 삼킨 피눈물

남들이 보기엔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완벽한 삶이었습니다. 대기업 다니는 남편에 번듯한 내 집 마련, 그리고 갓 뽑은 새 차까지. 하지만 그 눈부신 화려함은 저를 가두는 거대한 유리성이었고, 그 안에서 제 속은 시커먼 숯덩이가 되어 타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남들의 부러움 섞인 인사가 차가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히던 그 시절, 저는 화려한 껍데기를 유지하기 위해 제 영혼을 갈아 넣으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습니다. 겉모습은 평온한 바다 같았으나, 그 아래에는 저를 집어삼킬 듯한 거센 파도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던 셈입니다.

특히 제가 장사하던 곳이 바로 우리가 살던 아파트 단지의 상가였기에, 저는 단 한 순간도 마음 편히 제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 이웃들이 곧 제 손님이었고 제 평판이 바로 가게의 목숨줄이었으니, 집안의 치부를 들키지 않으려 저는 매일같이 아무 일 없는 척 웃음을 지어야만 했습니다. 무엇보다 남편을 비롯한 시댁 식구들의 기세가 참으로 드셌습니다. 다들 음성도 크고 성격들이 불 같아서, 한번 소란이 일면 아파트 복도까지 목소리가 새 나가는 건 예삿일이었지요. 남편의 외도를 알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도, 저는 큰소리 한번 제대로 내지 못했습니다. 행여나 그 큰 목소리들이 밖으로 새 나가 동네에 소문이라도 날까 봐, 내 얼굴에 침 뱉기 될까 봐 입술을 깨물며 참아냈습니다.

당시 남편이 다니던 회사는 마치 기괴한 열병이라도 도는 것 같았습니다. 직원들마다 너나 할 것 없이 밖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무슨 유행이나 훈장이라도 되는 양 휩쓸려 다니던 기막힌 시절이었지요. 주변 아주머니들이 조심스레 다가와 "거기도 조심해야겠어"라며 충고를 해줄 때마다 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바보같이 그 말들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내가 이만큼 희생하고 있고, 우리 아버지가 저렇게 병마와 싸우고 있는데 설마 내 남편까지 그 몰상식한 열병에 휩쓸렸을 리가 없다고 스스로를 속이며 더 미친 듯이 재봉틀을 돌렸습니다.

사실 그 시절 제 인생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이름은 친정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삶의 의지를 놓지 않으려 애쓰셨지요. 병세가 조금이라도 나아져 기운을 차리시면, 고향 바다로 내려가 당신의 유일한 낙인 초망(투망)을 치러 새벽 공기를 가르며 나가시곤 했습니다. 어스름한 새벽녘, 아픈 몸을 이끌고 바다를 향해 그물을 던지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목이 메어옵니다. 아버지는 딸이 대기업 사위 만나 번듯하게 잘 사는 모습이 당신 인생의 마지막 훈장인 양 기뻐하셨기에, 저는 그 앞에서 차마 제 불행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습니다. 밖으로 새 나갈까 무서운 시댁 식구들의 큰 목소리를 안으로 삼키며, 아버지의 그 무구한 믿음을 지켜드리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효도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왜 그렇게 미련하게 살았는지, 왜 나 자신을 그토록 처참하게 방치하며 남의 인생 황금기만 만들어주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입니다. 시댁 식구들의 드센 기세에 눌려, 그리고 동네 소문이 무서워 숨죽였던 그 세월들이 이제 와서야 "참으로 고단했노라"는 깊은 탄식으로 남습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그 화려했던 시절이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때는 그게 인생의 가장 큰 고비인 줄 알았지만, 사실 그것은 앞으로 닥쳐올 더 거대한 시련들의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그때 그 화려한 거실에서 홀로 삼켰던 눈물은, 앞으로 겪어야 할 수많은 폭풍우를 견디기 위한 눈물겨운 예방주사였을지도 모릅니다.

[인생이야기] 대기업 다니는 남편과 아반떼 새 차, 그 평탄함 속에 감춰둔 속마음

 

[인생이야기] 대기업 다니는 남편과 아반떼 새 차, 그 평탄함 속에 감춰둔 속마음

대기업 남편과 맞벌이로 일궈낸 경제적 안정

그 당시 우리 집 형편은 겉으로 보기에 제법 안정적이었습니다. 남편은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고, 시어머니께서 집에서 아이를 봐주셨기에 저도 마음 놓고 밖에서 돈을 벌 수 있는 환경이었지요. 남편은 밖에서 성실히 직장 생활을 하고, 저 또한 홈패션 가게에서 밤낮없이 주문을 받아 부지런히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둘이서 열심히 맞벌이를 한 덕분에 경제적으로는 크게 부족함이 없는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생애 첫 새 차 '아반떼'와 남들의 부러움

그 무렵 현대자동차에서 '아반떼'라는 차가 처음 출시되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우리 부부도 그 흐름에 맞춰 생애 첫 새 차로 아반떼를 한 대 뽑았습니다. 반짝이는 새 차를 마당에 세워두고 보니, 8남매 중 일곱째로 자라며 고생했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며 감회가 참 새로웠습니다. 남들 눈에는 대기업 다니는 남편에, 기술 가진 아내, 그리고 귀한 손주를 봐주시는 시어머니까지 계시니 참 복 많은 집안이라 불릴 만한 시절이었습니다.

겉모습과 달리 마음 한구석에 쌓이던 스트레스

하지만 집안 형편이 조금씩 피어나고 살림살이가 나아진다고 해서 제 마음까지 마냥 편안했던 것은 아닙니다. 밖에서 보기엔 평온한 가정이었지만, 저는 저대로 말 못 할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시어머니와 한 지붕 아래 살며 아이를 맡기고 장사를 나가는 일은,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늘 조심스럽고 어려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내 아이를 내 손으로 오롯이 키우지 못한다는 미안함과 고부간의 미묘한 갈등은 퇴근 후에도 저를 짓누르는 큰 짐이었습니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감내해야 했던 시간들

남편은 직장 생활에 충실하며 집안이 화목하게 돌아가는 것에 만족해했지만, 저는 가게 일과 집안일 사이에서 늘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홈패션 가게에 앉아 재봉틀을 돌리면서도 머릿속은 늘 집안 걱정과 아이 걱정으로 가득 찼습니다. 겉으로는 새 차를 타고 다니며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하는 듯 보여도, 속으로는 그 안정감을 유지하기 위해 제가 혼자 감내해야 했던 정신적인 피로감이 상당했던 시기였습니다.

35년 자영업 인생의 한 페이지를 돌아보며

35년 자영업 인생을 돌이켜보면, 그때처럼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가 가장 평탄해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 단순히 돈이 모이고 좋은 차를 탄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더군요. 남편의 대기업 월급과 제가 번 돈으로 살림은 윤택해졌을지언정, 제 마음 한구석에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스트레스가 켜켜이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의 담담한 기록들이 이제는 제 인생의 소중한 한 페이지가 되어 이렇게 글로 남게 되었습니다.

2026년 3월 3일 화요일

좁은 아파트, 네 아이의 울음소리와 참아내야 했던 한숨

좁은 아파트, 네 아이의 울음소리와 참아내야 했던 한숨

둘째를 낳고 한 달 만에 홈패션 가게로 돌아온 제 일상은 그야말로 전쟁터였습니다. 당시 친정아버지는 수술 후 대구 언니 집에서 항암 치료를 받으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계셨습니다. 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아버지의 부재는 제 마음을 텅 비게 만들었지만, 슬퍼할 겨를도 없이 저를 기다리는 건 숨 막히는 집안 현실이었습니다. 남편의 고집으로 모셔온 시어머니와의 합가는 상상 이상의 스트레스였고, 갓 해산한 몸으로 시어머니 눈치를 보며 살림을 챙겨야 했던 그 시간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듯 위태로웠습니다.

무엇보다 저를 미치게 했던 건 집안을 가득 채운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이었습니다. 우리 집에는 이제 겨우 여섯 살 된 큰애와 갓난쟁이 둘째가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던 시누이는 자기 집 애들 둘을 시도 때도 없이 저희 집에 맡기곤 했습니다. 좁은 아파트 거실은 순식간에 아이 셋, 네 명의 울음소리와 장난감으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내 아이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산달에, 조카들까지 줄줄이 떠맡게 된 현실이 참으로 가혹했습니다. 낮에는 가게에서 재봉틀과 씨름하고, 밤에는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넋이 나간 채 하루를 버텨야 했습니다.

워낙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잘 참는 성격이라 겉으로는 묵묵히 그 소란을 다 받아냈지만, 제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습니다. 가게에서 손님들 이불을 지으며 온종일 기운을 다 빼고 녹초가 되어 돌아와도, 집은 편히 쉴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시어머니는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고생하신다며 제가 오기만을 기다리셨고, 저는 앞치마를 벗기도 전에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 저녁을 짓고 아이들을 씻겨야 했습니다. 시누이는 같은 단지에 살면서도 미안한 기색 없이 아이들을 맡겼고, 저는 거절 한마디 못 한 채 그 무거운 짐을 다 짊어졌습니다. 제 몸 하나 추스를 틈 없이 남의 집 아이들까지 돌보며 북적거리는 거실 한복판에 서 있을 때면, 지독한 외로움이 밀물처럼 밀려오곤 했습니다.

그 시절 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남편의 무심함이었습니다. 집안이 아이들 소리로 시끌벅적하니 남편은 그저 '사람 사는 집 같다'며 허허거렸지만, 그 소란을 지키기 위해 제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삼키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시어머니와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생겨도, 시누이네 아이들 때문에 제 아이가 뒷전으로 밀려나도 저는 그저 '내가 조금 더 고생하고 말지' 하는 마음으로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대구에서 투병 중이신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집안 시끄럽게 불평을 늘어놓을 수는 없었기에, 그 모든 화와 스트레스를 가슴 깊은 곳에 꾹꾹 눌러 담으며 버텼습니다. 꾹 참는 것이 미덕이라 믿었던 그 성미가 그때는 제 스스로를 갉아먹는 독이 되고 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모진 세월을 어떻게 견뎠나 싶습니다. 대구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걱정과 시어머니와의 불편한 동거, 그리고 내 아이와 조카들까지 뒤엉킨 그 아수라장 속에서 저는 엄마라는 이름 하나로 그 모든 풍파를 온몸으로 막아냈습니다. 35년 장사 인생 중 가장 어둡고 긴 터널 같았던 그 시절, 차가운 재봉틀 소리만이 제 서러운 마음을 알아주는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비록 제 젊음은 그렇게 희생과 인내로 채워졌지만, 그 시절의 모진 바람을 견뎌냈기에 지금의 제가 이토록 단단해질 수 있었음을 이제는 압니다. 그 북적이는 소란 속에서도 기어이 가정을 지켜낸 제 자신이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론 참 가슴이 아릿해 옵니다.

2026년 3월 1일 일요일

내 손으로 키우고 싶었던 꿈과 재봉틀 소리에 묻어둔 서러움

 

내 손으로 키우고 싶었던 꿈과 재봉틀 소리에 묻어둔 서러움

둘째 딸의 탄생은 제게 너무나 소중하고 간절한 기회였습니다. 8남매 중 일곱째로 자라며 늘 따뜻한 엄마의 품이 그리웠던 제게, 내 아이를 온전히 내 손으로 키울 수 있다는 것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꿈이었지요. 이번만큼은 내가 직접 고운 천을 골라 포근한 이불을 지어 아이를 입히고, 쌔근쌔근 잠든 아이의 숨소리를 온종일 곁에서 지켜보며 키우고 싶었습니다.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내 온기를 아이에게 오롯이 나누어주는 것, 엄마로서 그 당연하고 소박한 행복을 누려보는 것이 제게는 인생의 가장 큰 소원이었습니다. 하지만 냉정한 현실은 그 작은 바람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제 간절한 마음을 헤아려주기는커녕, 산후조리도 채 끝나지 않은 저를 다그치며 하루라도 빨리 홈패션 가게로 복귀하기만을 바랐습니다. 갓 해산한 몸은 찬바람만 스쳐도 뼈마디가 시려 왔지만, 남편의 눈에는 밀려드는 주문과 가게 운영이 먼저였나 봅니다. 아이의 보드라운 살결을 비비며 젖을 물려야 할 시기에, 저는 가게의 서늘한 천 먼지와 삭막한 재봉틀 소리를 먼저 마주해야 했습니다. 가게 문을 열 때마다 느껴지던 그 차가운 공기는 제 서러운 마음을 더욱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엄마로서 아이 곁을 지키고 싶었던 제 간절한 소망은 그렇게 남편의 완강한 고집 앞에 속절없이 꺾여버렸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남편이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시어머니를 저희 집으로 모셔온 일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봐주실 테니 저는 집안일이나 육아 걱정 말고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데만 전념하라는 식이었지요. 하지만 시어머니와 한집에 살며 아이를 맡기고 장사를 나가는 일은 제게 지독한 스트레스였습니다. 내 아이인데도 내 마음대로 안아주거나 얼러주지 못하고, 살림살이 하나하나 시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던 그 시간은 숨이 막힐 듯한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가게에서 일을 하다가도 집에서 아이가 울고 있지는 않을지, 시어머니가 불편해하시지는 않을지 걱정하느라 제 마음은 단 한 순간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홈패션 가게에 앉아 차가운 재봉틀 앞에 앉아 있을 때면, 손님들의 이불을 지으면서도 제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습니다. 다른 집 아이들이 덮을 포근한 침구는 정성껏 만들면서 정작 내 아이는 남의 손에 맡겨두고 온 현실이 너무나 비참해 재봉틀 소리에 맞춰 남몰래 울기도 참 많이 울었습니다. 35년 자영업 인생 중 그때만큼 몸과 마음이 고달팠던 적이 없었습니다. 엄마로서의 권리마저 빼앗긴 채 그저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기계가 된 것만 같은 서러움에, 앞치마 끈을 조여 맬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시려 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제 속사정은 아랑곳없이 세상은 무심히도 흘러갔습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들은 남편의 속마음은 저를 더욱 허탈하게 만들었습니다. 남편은 나중에야 그때가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웠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하더군요. 본인의 어머니가 아이를 봐주시고 아내는 밖에서 착실히 홈패션 장사를 해오니, 집안이 화목하고 경제적으로도 부족함 없다고 느꼈다는 것입니다. 제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서러워했던 것, 시어머니 눈치를 보며 숨죽여 지냈던 그 고통은 꿈에도 모른 채 본인만 행복했다고 말하는 남편이 너무나 야속해 한동안 가슴이 먹먹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가장 따뜻했던 기억이, 그 시간을 온몸으로 버텨낸 제게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서러운 멍울이 된 셈입니다.

이 모든 마음의 짐 속에서 저를 더 아프게 했던 건 바로 친정아버지의 소식이었습니다. 평생 그토록 판소리를 좋아하고 잘하시던 우리 아버지는, 하필 제가 이 모진 풍파를 겪던 시기에 수술을 받으셨고 그와 동시에 영영 목소리를 잃으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소리가 끊긴 그 적막한 고통과 아이를 직접 키우지 못하는 미안함을 동시에 짊어진 채, 억척스럽게 재봉틀을 돌려야만 했습니다. 다시는 아버지의 구성진 판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슬픔이 가슴을 후벼 팠지만, 저는 울음을 삼키며 가정을 지키기 위해 가게를 지켰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서러움은 흉터처럼 남았지만 그 모진 세월을 견디며 지켜낸 이 소중한 가족들이 있기에 오늘도 저는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며 살아갑니다.

서른아홉 늦둥이의 온기, 그리고 한 달 만에 마주한 차가운 현실

 막둥이를 낳고 이번만큼은 제대로 된 휴식을 꿈꿨습니다. 서른아홉이라는 늦은 나이에 찾아온 귀한 생명이었기에, 앞선 두 딸을 낳고 몸조리도 못한 채 일터로 달려가야 했던 그 서러운 세월을 보상받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야속하게도 이전과 똑같이 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