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이야기}제주도 유채꽃밭에 핀 일곱 송이 빨간 꽃, 7자매의 웃음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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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채꽃보다 더 붉게 피어난 우리 일곱 자매의 모습입니다. 드레스코드를 레드로 맞췄더니 제주도의 봄이 더 화사하게 느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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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채꽃보다 더 붉게 피어난 우리 일곱 자매의 모습입니다. 드레스코드를 레드로 맞췄더니 제주도의 봄이 더 화사하게 느껴지네요. |
어머니 없이 자란 설움에 예의 하나만큼은 철저히 지키며 살아온 저였습니다. 딸 많은 집 딸들이 엄마 없이 자란다고 손가락질받을까 봐, 노심초사하시며 엄격히 예의를 가르치셨던 우리 아버지가 계셨기에 저는 평범한 결혼을 꿈꾸며 살았습니다.
특히 첫 인사 가는 날, 저는 제 옷차림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쏟았습니다. 혹시라도 구겨진 옷자락 하나 때문에 "역시 엄마 없는 자식이라 티가 난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몇 번이고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를 다듬었습니다. 단정하고 깨끗한 옷차림은 저에게 단순한 치장이 아니라, 저를 귀하게 키워주신 아버지의 자부심이자 제 마지막 자존심이었습니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찾아간 35년 전 첫 인사 자리.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시어머니의 태도는 제 상식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배를 깔고 누워 "왔나" 한마디로 사람을 투명인간 취급하던 그 무례함. 나중에야 알게 된 그 속마음은 더욱 기가 막혔습니다. 시어머니는 애초에 아들을 결혼시킬 생각이 없으셨던 겁니다.
고생해서 키운 아들이 대기업에 취직하자마자 결혼을 하겠다고 하니, 시어머니 눈에는 제가 '아들이 벌어올 돈을 가로채러 온 사람'으로 보였나 봅니다. 청상과부로 홀로 자식들을 키운 보상을 아들의 월급봉투로 받고 싶으셨겠지요. 아들이 돈 좀 벌어서 집안 살림도 좀 피게 해주고, 본인 호강도 시켜준 다음에나 장가를 보내고 싶으셨던 그 지독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 욕심 때문에 저라는 한 사람의 인격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단정하게 차려입고 간 제 정성 어린 모습보다, 제가 아들의 월급봉투를 나눠 가질 존재라는 사실에만 분노하셨던 겁니다. "엄마 없는 자식이라 살림이나 하겠냐"며 던졌던 비수 같은 말들도, 사실은 제가 싫어서가 아니라 아들을 놓아주기 싫어서 부렸던 심술이었습니다. 자식의 행복보다 자식이 벌어올 돈을 먼저 계산했던 그 이기적인 마음이, 한 젊은 여자의 인생을 얼마나 처참하게 짓밟았는지 시어머니는 끝내 모르셨을 겁니다.
그때 저는 바보같이도 "내가 더 열심히 벌고, 내가 더 잘하면 어머니 마음이 돌아서겠지"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15년 이불 장사, 20년 식당 장사를 하며 억척스럽게 살았습니다. 시어머니가 그렇게 바라던 '돈'을 보란 듯이 벌어보겠다고 몸이 부서져라 일했습니다. 제가 예의 없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 그리고 우리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지 않으려 그 모진 세월을 버텨낸 것입니다.
식당 주방에서 뜨거운 불 앞에 서 있을 때도, 이불 보따리를 짊어지고 다닐 때도 제 머릿속엔 오직 하나뿐이었습니다. '어머니, 저 이렇게 잘 살고 있습니다. 저 돈도 잘 벌고 살림도 잘합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인정해 주세요.' 하지만 돌아오는 건 늘 차가운 시선과 더 큰 요구뿐이었습니다. 사람의 인정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모진 풍파를 다 겪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35년이라는 긴 세월을 오직 그 '오기' 하나로 버텼던 제 청춘이 참으로 가엽게 느껴지는 밤입니다.
하지만 35년이 지나 깨달은 것은, 사람을 돈줄로 보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다주어도 만족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들의 앞길을 축복해 주기보다 자신의 노후 대책으로 삼으려 했던 시어머니의 그 '본데없는' 욕심이 결국 우리 가족 모두의 가슴에 깊은 멍을 들게 했습니다. 만약 그때 그 욕심 어린 눈빛을 더 정확히 읽었더라면, 저는 제 소중한 청춘을 그런 무례함 속에 던져두지 않았을 겁니다.
이제야 깨닫습니다. 돈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지만, 한 사람의 인격을 짓밟으며 쌓은 욕심은 결국 비극으로 돌아온다는 것을요. 35년 장사 고비마다 저를 일으킨 건 돈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겠다'는 의지였습니다. 혹시 지금 누군가의 무례함 때문에 가슴앓이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상대의 비뚤어진 욕심에 당신의 귀한 인생을 너무 오래 맡겨두지 마세요.
8남매 중 일곱째 딸. 엄마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7살 어린 나이에 저는 엄마를 여의었습니다. 새엄마 밑에서 눈치껏 자라며 제가 배운 것은 '내 편 하나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이었습니다. 따뜻한 밥 한 끼보다 엄마의 온기가 더 그리웠던 그 시절, 저에게 결혼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과 사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나를 지켜줄 유일한 울타리이자, 일찍 잃어버린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줄 안식처를 찾는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하지만 35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순진했던 저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 울타리가 네 온몸을 옥죄고, 네 인생을 통째로 갈아 넣어야 유지되는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단다"라고요.
그때의 저는 결혼이라는 문을 열면 꽃길만 펼쳐질 줄 알았지, 그 뒤에 기다리는 혹독한 시집살이와 가장의 무게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려 선택한 결혼이었는데, 정작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엄마의 온기가 아니라 시어머니의 서슬 퍼런 눈치와 끝없는 가사 노동, 그리고 장사의 고단함이었습니다. 7살 어린 소녀가 꿈꿨던 안식처는 온데간데없고, 저는 어느덧 한 집안의 운명을 짊어진 무거운 '가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어리광 한번 부려보지 못한 채, 저는 그렇게 어른이 되기도 전에 '아내'와 '며느리'라는 무거운 이름표를 달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가 가졌던 불안함은 심리학적으로 보면 '애착의 결핍'을 채우려는 시도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채 뛰어든 결혼 생활은 제 자아를 찾기도 전에 타인을 위한 삶으로 저를 몰아넣었습니다.
결혼은 둘이 만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전쟁터였습니다. 한 남자의 아내가 되는 순간, 저는 내 이름 석 자를 잃어버렸습니다. 시어머니의 며느리로, 시누이들의 올케로, 그리고 곧이어 태어난 아이들의 엄마로만 불리며 35년을 살았습니다. 마음의 병을 앓는 남편을 다독이며 가게를 지켜야 했고, 시어머니 밑에서 숨 한 번 크게 쉬지 못하고 눈치를 보며 살았습니다.
15년은 이불 장사로, 20년은 식당 사장으로 살며 제 손마디는 굵어지고 거칠어졌지만, 정작 제 마음의 상처는 돌볼 틈조차 없었습니다. "사장님 소리 들으며 돈 벌면 됐지"라고 남들은 쉽게 말하지만, 매일 아침 인건비를 단돈 만 원이라도 아끼려 새벽같이 일어나 직접 칼을 잡고 고기를 썰던 그 고단함을 누가 알까요. 고기를 썰며 떨어지는 것이 육즙인지 제 피눈물인지 모를 세월을 20년이나 버텼습니다. 손목이 시큰거리고 어깨가 무너져 내려도 "엄마는 괜찮다"는 말로 자식들을 안심시키며 살아온 세월이었습니다. 35년 장사 인생은 저에게 경제적 자립을 주었을지 모르나, 제 청춘과 바꾼 가혹한 거래이기도 했습니다.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고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35년 동안 앞치마 한 번 편히 풀어보지 못한 채, 가족이라는 이름의 짐을 짊어지고 달려온 저는 이제 지쳤습니다. 만약 지금 저에게 다시 35년 전 예식장에 서 있을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는 그 화려한 드레스를 과감히 벗어 던지고 제 갈 길을 찾아 떠날 것입니다. 누구의 아내도, 누구의 며느리도 아닌 그냥 '나'로서 자유롭게 세상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거창한 여행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저 해 지는 노을을 아무런 걱정 없이 바라보고, 누구의 끼니도 걱정하지 않은 채 오로지 나를 위한 차 한 잔을 마시고 싶을 뿐입니다. 희생이 미덕인 줄 알고 살았던 지난 세월을 뒤로하고, 이제는 제 자신의 행복을 우선순위에 두고자 합니다.
오늘 저는 그 길고 긴 전쟁 같은 결혼 생활의 첫 페이지를 블로그에 넘깁니다.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는 이 짧은 한마디 뒤에 숨겨진, 차마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이제 하나씩 꺼내 보려 합니다. 저처럼 가슴 한구석에 응어리 하나쯤 품고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아내분과 어머니분들, 제 투박하고 긴 기록이 여러분께 작은 위로와 공감이 되길 바랍니다. 인생의 후반전은 이제 누구의 며느리도, 엄마도 아닌 저 자신의 이름으로 당당히 살아가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8남매 중 일곱째 딸입니다. 어제는 제가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블로그에 글도 못 올리고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습니다. 35년 넘게 장사하면서 아픈 줄도 모르고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이제는 제 몸이 먼저 쉬어가라고 강한 신호를 보내나 봅니다. 하루 쉬어가니 제 글을 기다려주신 분들께 미안한 마음이 앞서네요. 병원 가서 링거 한 대 맞고 가만히 누워 수액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걸 보고 있으니, 참 묘하게도 옛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더군요. 제 인생에서 가장 간절했고, 그만큼 뜨거웠던 '열아홉 살의 봄' 이야기입니다.
중학교를 졸업했을 때 제 앞길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습니다. 8남매 중 일곱째라는 처지에 시골 살림은 늘 쪼들렸고, 새어머니와의 갈등 속에서 "고등학교에 가고 싶다"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할 금기어와 같았습니다. 동네 친구들이 새 교복을 입고 깔깔거리며 학교로 향할 때, 저는 가방 대신 작업 도구를 들고 일터로 향해야 했습니다.
공부가 너무나 하고 싶었지만, 제 설움을 들어줄 곳도, 도와달라고 손 내밀 곳도 없었습니다. 그때 어린 마음에도 입술을 피가 나도록 꽉 깨물고 다짐했습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겠다. 내 손으로 직접 벌어서 당당하게 내 발로 학교에 가리라." 그 시절의 고생은 지금 떠올려도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고 눈물이 핑 돕니다. 하지만 그 차가웠던 일터의 공기가 지금의 저를 만든 단단한 거푸집이 되었습니다.
남들 학교 다닐 때 저는 3년을 꼬박 일에 매달렸습니다. 또래보다 늦게 간다는 사실이 때론 속상하고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제 목표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내 힘으로 온전한 학비를 마련하는 것. 그것이 저의 자존심이었습니다. 새엄마 눈치 보며 서러운 날도 많았고, 고된 노동에 손마디가 아려올 때도 있었지만, 한 푼 두 푼 모여가는 통장의 숫자를 보며 버텼습니다.
마침내 제 힘으로 번 돈을 들고 고등학교 입학 원서를 내던 날의 그 떨림은 35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입학 서류가 아니라, 세상을 향해 "나는 내 힘으로 일어섰다"고 외치는 제 인생의 첫 번째 승리 선언이었습니다. 열아홉, 남들은 입시를 고민할 나이에 저는 비로소 꿈에 그리던 '학생'이 되었습니다.
남들보다 3년 늦게 입은 교복이었지만, 저는 누구보다 당당했습니다. 세 살 어린 동생들과 같은 교실에 앉아 공부하는 게 처음엔 조금 쑥스럽기도 했지만, 이내 그 생각은 사라졌습니다. 이 자리는 누가 거저 준 것이 아니라, 제가 3년 동안 피땀 흘려 스스로 차려낸 제 인생의 성찬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이 길었던 만큼 수업 시간 1분 1초가 보석처럼 귀했습니다. 남들이 지루해하는 교과서의 문장들이 제게는 세상 무엇보다 달콤한 지혜로 다가왔습니다. 그때 저는 배움보다 더 소중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스스로 일구어낸 삶은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자립의 정신이었습니다. 그 당당함이 있었기에 저는 열아홉 살의 1학년 생활을 제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으로 기억합니다.
어제 병원 침대에 누워 수액을 맞으며 다시금 확신했습니다. 그때 그 고생했던 3년의 시간이 없었다면, 15년 홈패션 매장과 20년 식당 장사의 그 모진 세월을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라고요. 남들보다 조금 늦게 가도 결국 도착한다는 것, 그리고 내 힘으로 일구면 그 무엇보다 뿌리가 깊고 단단하다는 것을 저는 열아홉에 이미 배웠습니다.
덕분에 62년 인생을 살아오면서 IMF니 코로나니 하는 숱한 풍파가 닥쳐도 '그래, 열아홉에도 내 힘으로 학교에 갔는데!' 하며 다시 앞치마를 질끈 묶고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어제 하루 못 올린 글까지 담아 두서없이 써 내려갔지만, 쉬고 나니 다시 기운이 납니다. 저처럼 지금 삶의 무게에 눌려 힘들어도 자기 길을 묵묵히 걷고 계신 모든 분을 오늘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우리 인생에 늦은 때란 없습니다. 스스로 시작하는 그 순간이 가장 찬란한 전성기입니다.
주민등록상으로는 오늘이 제 생일입니다. 아침부터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리고 지인들이 축하 메시지를 보내오지만, 사실 제 마음은 아주 오래전, 일곱 살 어린 소녀의 기억 속으로 달려갑니다. 남들은 축복 속에 기억되는 생일이라지만, 저에게 생일은 오랫동안 메워지지 않는 빈자리와 같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제 진짜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십니다.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난 저를 낳으실 때, 엄마는 너무 아파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셨다고 합니다. 온 가족이 엄마를 살리느라 정신이 없던 그 경황없는 세월 속에, 막내나 다름없던 제 생일 날짜는 아무도 챙기지 못한 채 잊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린 시절, 친구들이 생일이라고 미역국을 먹고 파티를 할 때면 제 마음 한구석은 늘 시리고 허전했습니다. "아버지, 제 생일은 언제예요?"라고 물어도 아버지는 그저 먼 산을 보며 "네 엄마가 너 낳고 죽을 뻔해서 날짜도 모른다"는 말씀만 되풀이하셨습니다. 일곱 살 어린 나이에 끝내 엄마를 여의고 새엄마 밑에서 자라며, 제 생일은 그렇게 세상에 없는 듯이 조용히 지나가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생일이라기보다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이 교차하는 날이었습니다.
결혼해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자상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남편에게 생일을 챙겨달라 떼쓰는 것은 사치처럼 느껴졌습니다. 저조차 진짜 제 생일을 모르니 남에게 챙겨달라 말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생각나면 챙기고, 바쁘면 그냥 지나치기를 수차례. 15년 홈패션 매장을 운영하고 20년 식당 불 앞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살면서 제 자신을 돌볼 여유는 단 1분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아이들이 커가면서 "엄마 생일 축하해요"라며 챙겨주는 정도가 제 유일한 위안이었습니다. 35년 넘게 자영업의 풍파를 온몸으로 맞으며 살다 보니, 생일은 그저 '또 한 살 먹고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 깊은 곳에는 늘 나만을 위한 '진짜 축하'를 받고 싶은 어린 소녀의 갈망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입니다. 평생을 '진짜' 날짜를 모른 채 호적상 생일로 살아온 저에게, 올해는 아주 특별한 선물들이 쏟아졌습니다. 35년 넘게 거친 세상을 버텨온 저에게, 오늘 현대해상에서 보험 환급금 500만 원이 입금되었다는 기적 같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설계사인 시누이와의 해묵은 갈등으로 마음고생 하며, 당당하게 내 권리를 찾겠다고 선언했던 바로 그날, 거짓말처럼 이 돈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돈 500만 원이 아니라, 제가 그동안 참아왔던 세월에 대한 보상이자 제 자존심을 되찾은 승리의 훈장이었습니다. 게다가 오늘 처음 시작한 블로그 화면에서는 축하 풍선들이 두둥실 날아다니며 저를 반겨주었습니다. 구글이라는 똑똑한 시스템이 제 외로운 생일을 축하해 주는 것 같아 목이 메고 뭉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진짜 생일 날짜는 몰라도 이제는 정말 괜찮습니다. 오늘 느낀 이 기쁨과 당당함이 제 인생의 '진짜 생일 선물'이라 믿고 싶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목숨 걸고 저를 낳아주신 그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게, 저는 오늘도 이렇게 씩씩하게 제 길을 가고 있습니다. 35년 장사 인생으로 다져진 맷집과 8남매 일곱째로 자란 강인함으로 저는 이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당당한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일곱 살의 외로웠던 어린 나에게 오늘 진심을 담아 말해주고 싶습니다. "너는 참 귀하게 태어났고, 누구보다 장하게 잘 컸다. 오늘 네 생일을, 그리고 네가 되찾은 네 인생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오늘이야말로 제가 다시 태어난 진짜 생일입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대부분 안개 속처럼 희미합니다. 7살에 엄마를 여의고 앞만 보고 살아온 고달픈 세월 탓인지, 기억의 페이지들은 빛바랜 사진처럼 지워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첫 소풍날의 기억만큼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슴 한구석에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아니, 차라리 잊혔으면 좋았을 만큼 시리고 아픈 기억입니다.
그날은 온 동네 엄마들이 화사한 옷을 입고 정성껏 싸온 도시락을 들고 따라오던 잔칫날 같았습니다. 연두색으로 물든 들판 위로 화려한 돗자리들이 꽃처럼 깔리고, 친구들은 엄마들과 삼삼오오 무리 지어 재잘거리며 웃음꽃을 피웠습니다. 하지만 엄마 없는 8남매 중 일곱째인 저에게 그 풍경은 다른 세상 이야기였습니다.
엄마들과 모여 앉아 정답게 밥을 먹는 그 따스한 풍경이 너무나 부러워, 저는 멀찍이 서서 멍하니 그쪽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밥 한 술보다 엄마의 따뜻한 손길이 더 고팠던 그때, 제 귀에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박혔습니다. "에고, 저 집 애들 좀 봐... 엄마도 없이 소풍을 왔으니 어쩌나..." 동정 어린 그 말조차 어린 가슴에는 비수처럼 꽂혔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우리 큰엄마는 그 안쓰러운 수군거림을 듣고도 못 들은 척, 애써 고개를 돌려버리셨습니다. 언니와 저, 엄마 잃은 조카들을 한 번쯤은 챙겨주실 법도 한데, 큰엄마의 그 차가운 외면은 어린 마음을 더욱 얼어붙게 했습니다. 당시 큰집은 19가구뿐인 작은 동네에서 가장 부유한 편에 속했습니다. 종갓집이라 제사도 일 년에 열 번 넘게 지냈고, 먹을 것이 부족하던 그 시절 제삿날은 우리 남매들에게 유일한 잔칫날 같았습니다.
떡이며 과일이며 그날만큼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큰엄마는 참 인색하셨습니다. 제사 지내고 남은 떡에 파란 곰팡이가 피어 버려질지언정, 엄마 잃고 배고픈 조카들에게는 단 한 조각도 내어주지 않으셨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동정보다, 피를 나눈 친척 어른의 그 차가운 외면과 인색함이 일곱 살 제 가슴에는 지워지지 않는 시퍼런 멍으로 남았습니다.
부러움과 서러움이 뒤섞인 눈으로 화려한 돗자리 쪽을 바라보던 제 손을, 누군가 홱 낚아채듯 잡아끌었습니다. 바로 우리 언니였습니다. 엄마들 틈에서 기죽어 있는 동생의 눈빛이 너무나 안쓰러워, 언니는 제가 그 행복한 풍경을 더 보지 못하도록 사람 없는 나무 그늘 구석으로 저를 데려갔습니다.
화려한 꽃들 대신 칙칙한 흙바닥에 앉아, 언니와 저는 서로를 바라보며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서러운 눈물이 섞여 들어간 도시락을 함께 먹던 그 소풍날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하지만 그 시절 엄마 없는 설움이 사무치던 그 아픔은, 역설적으로 제가 35년 넘게 자영업의 모진 풍파를 견디고 인내하게 만든 가장 단단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오늘따라 그늘진 구석에서 울고 있던 어린 저와 언니를 꼭 안아주고 싶습니다. "그 눈물이 너를 이렇게 강한 사람으로 만들었단다"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살다 보니 잊고 지내는 것이 참 많습니다. 블로그에 하나씩 내 인생 이야기를 풀다 보니 오늘은 유독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풍경 하나가 떠오르네요. 내가 태어날 때부터 그 자리에 늘 있었던 곳, 우리 동네 논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던 작고 낡은 기와집 한 채. 그게 바로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관리하며 슬픔을 나누던 ‘상여집’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장례 전문 인력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지만, 그 시절엔 마을 사람들이 품앗이하듯 슬픔을 함께 나눴지요. 마을의 어른이 돌아가시면 그 낡은 기와집에서 화려하면서도 묵직한 상여가 실려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단순히 상여만 보관하던 곳이 아니었습니다. 마을 제사를 지내거나 큰 굿판이 벌어질 때 쓰던 장구, 징, 꽹과리 같은 민속 악기들도 모두 그 기와집 안에 고이 모셔두었지요.
어린 우리 눈에는 그 모든 풍경이 경건하기보다 무서웠습니다. 밤이면 상여집 안에서 누군가 징을 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같아 오싹했고, 그 근처를 지날 때면 괜히 뒤를 돌아보게 되곤 했습니다. 죽음과 신명이 한 지붕 아래 머물던 그 기묘한 공간은 어린 소녀였던 제게 세상의 깊은 신비로움을 처음 가르쳐준 곳이었습니다.
마을 제사가 있는 해면 집집마다 돌아가며 ‘제주(祭主)’를 맡곤 했습니다. 그해 제주가 된 집은 대문 앞에 푸른 솔잎을 끼운 새끼줄, 즉 금줄을 치고 바닥에는 붉은 황토 흙을 군데군데 놓아두었습니다. “이곳은 지금 신성한 곳이니 부정한 사람은 발을 들이지 마라”는 마을 전체의 무언의 약속이자 엄격한 계율이었습니다.
제사가 끝날 때까지는 이웃들도 그 집 문턱을 절대 넘지 않았고, 제주 가족들도 몸가짐을 극도로 조심하며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했습니다. 7살 어린 나이에 엄마를 여의고 8남매 중 일곱째로 자라던 제게, 대문 앞의 그 붉은 흙은 범접할 수 없는 경계선 같았습니다. 혹여 부정이라도 탈까 봐 숨을 죽이며 그 앞을 지나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정성이 곧 신앙이었던 시절의 순수한 풍경이었습니다.
참 묘한 일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던 그 상여집도, 대문 앞을 지키던 붉은 흙의 풍경도 어느 순간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언제 헐렸는지, 그 엄격하던 풍습이 언제 멈췄는지 도무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35년 넘게 장사하며 먹고사는 게 바빠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내 어린 시절의 공포도, 마을을 하나로 묶어주던 그 뜨거웠던 정성들도 그렇게 소리 없이 우리 곁을 떠나갔나 봅니다.
사진 한 장 남지 않은 기억이지만, 눈을 감으면 지금도 그 서늘한 기와지붕 아래서 금방이라도 징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습니다. 이제는 장례식장의 차가운 조명 아래서 기계적으로 이별을 맞이하지만, 가끔은 온 마을이 함께 울고 함께 정성을 들였던 그 상여집 앞마당이 그리워집니다.
여러분의 고향 길에도 이제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하지만 가슴 속엔 여전히 서늘하게 남아 있는 그 무섭고도 그리운 풍경이 하나씩 있으신지요? 오늘 저는 그 사라진 상여집의 문을 다시 열어, 제 인생의 잊혔던 조각 하나를 기록으로 남겨봅니다.
주민등록상 제 생일인 오늘, 2년 전 남편의 환갑을 맞아 온 가족이 다녀왔던 제주도 여행의 사진을 다시 꺼내 봅니다. 사실 저와 남편에게 이 여행은 남들 다 가는 흔한 관광이 아니었습니다. 15년 침구 사업과 20년 요식업, 도합 3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제대로 된 여행 한 번 가보지 못하고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 부부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생애 첫 휴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참으로 무거운 단어입니다. 15년 동안 홈패션 침구 사업을 할 때는 이불 보따리를 짊어지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느라 발바닥이 부르트기 일쑤였고, 이후 20년 동안 식당을 운영하면서는 1년 365일 시뻘건 가스불 앞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남들 다 쉬는 명절이나 휴가철이 저희 같은 자영업자들에게는 가장 바쁜 대목이었기에, 우리 가족의 달력에는 '휴가'라는 글자가 적힐 틈이 없었습니다.
"가게 문 닫으면 단골손님들 헛걸음할 텐데", "하루라도 쉬면 내일 장사에 지장이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여행은커녕 가까운 나들이 한 번 마음 편히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8남매 중 일곱째 딸로 태어나 일찍 엄마를 여의고 고생하며 자란 탓인지, 저에게는 쉬는 것보다 일하는 것이 더 익숙한 삶이었습니다. 그렇게 남편과 저는 서로의 얼굴에 늘어가는 주름조차 찬찬히 들여다볼 여유 없이, 오로지 자식들 키우고 먹고사는 일에만 온 청춘을 다 바쳤습니다.
어느덧 35년이 흘러 남편이 환갑을 맞이했을 때야, 저희는 처음으로 큰맘 먹고 가게 문을 닫았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제주도 바다는 제 눈물만큼이나 푸르고 깊었습니다. 그 여행 중 방문했던 아르떼뮤지엄 티바(Tea Bar)는 제 인생에서 가장 환상적이고도 뭉클했던 순간으로 기억됩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주문한 차가 담긴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순간이었습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찻잔을 중심으로 형형색색의 예쁜 꽃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활짝 피어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디지털로 구현된 영상이었지만, 35년 평생 식당 주방에서 김치 냄새, 고기 냄새만 맡으며 살아온 저에게는 그 꽃들이 세상 그 어떤 꽃보다 향기롭고 아름답게 다가왔습니다.
그날 찻잔 위에서 피어나던 꽃들은 마치 저에게 **"그동안 참 장하게 잘 버텼다, 이제는 너도 이 꽃처럼 좀 피어나도 된다"**라고 말하며 제 거칠어진 손을 어루만져 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환상적인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우리 가족의 앞날도 이제는 이 찻잔 속 꽃처럼 고생 끝에 활짝 피어나길 간절히 소망해 보았습니다.
| 35년 장사하느라 처음 간 제주 여행에서 본 꽃차 |
침구 사업 15년, 요식업 20년... 거친 세상을 버텨오느라 남편과 이런 여유를 누려본 게 참으로 오랜만 아니, 사실상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날만큼은 주문 들어온 음식을 서두르지 않아도 되었고, 손님들의 요구에 허리 굽히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아내이자 엄마로서, 남편과 마주 앉아 꽃차 한 잔을 나누는 그 평범한 일이 35년 만에 처음 느껴보는 가장 큰 호사였습니다.
지금은 다시 장사 현장으로 돌아와 앞치마를 두르고 있지만, 2년 전 그날 마셨던 따뜻한 차의 향기와 가족들의 해맑은 웃음소리는 여전히 제 가슴 한구석에 선명한 훈장처럼 남아 있습니다. 삶이 고단하고 장사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저는 제주도 찻잔 위에 피어나던 그 찬란한 꽃들을 떠올립니다.
비록 진짜 제 생일 날짜는 몰라 호적상 생일로 오늘을 보내고 있지만, 제주도에서 마주한 그 꽃차처럼 제 남은 인생도 늘 아름답게 피어나길 빌어봅니다. 35년이라는 긴 터널을 묵묵히 함께 걸어와 준 남편에게, 그리고 장한 우리 아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오늘 제 이야기가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모든 자영업자분께 따뜻한 꽃차 한 잔 같은 위로가 되길 소망합니다.
울진 왕피천의 추억, 아버지의 초망과 8남매를 키운 숭어 이야기
경상북도 울진, 한쪽으로는 왕피천이 흐르고 또 다른 쪽으로는 남대천이 굽이쳐 바다와 몸을 섞는 곳.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이 신비로운 길목은 제 고향이자, 우리 8남매의 유년 시절이 고스란히 담긴 삶의 터전이었습니다.아버지의 인생이 담긴 수제 그물, '초망'
저희 집은 10마지기 남짓한 적은 논으로 여덟 자식을 건사해야 했습니다. 농사만으로는 벅찼기에 아버지는 농사꾼이자 베테랑 어부로 사셔야 했죠. 아버지에게 **'초망(투망)'**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도구이자, 고단한 삶을 달래는 유일한 낙이었습니다.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 풍요로운 어장
매일 새벽 4시, 아버지는 정성껏 만든 초망을 메고 어김없이 바다로 향하셨습니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역(汽水域) 특유의 환경 덕분에 아버지의 그물에는 늘 생명력이 넘쳤습니다'생선 다라이를 머생리에 이고 걷던 등굣길
고기가 유난히 많이 잡히는 날이면, 새엄마와 저는 싱싱한 생선이 가득 담긴 커다란 **'다라이(함지박)'**를 머리에 이고 먼 장터까지 걸어갔습니다. 어린 내 목을 짓누르던 그 묵직한 무게를 견디며 생선을 다 팔고 나서야 저는 학교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안녕하세요. 8남매 중 일곱째, 오늘도 인생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일곱째 딸입니다. 어제 예고해 드린 대로, 오늘은 제 어린 시절 기억 속에서 가장 시끌벅적하고 활기찼던 **'정월대보름'**과 '지신밟기' 이야기를 꺼내 보려 합니다.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은 먼 옛날의 기억이지만, 제 눈앞에는 장구 치시던 아버지의 땀방울이 지금도 선명하게 보입니다.
요즘은 대보름이라고 해도 조용히 오곡밥 해 먹고 지나가는 정도지만, 제가 어릴 적 8남매와 함께 살던 고향 마을의 대보름은 명절만큼이나 큰 축제였습니다. 아침 일찍 눈을 뜨면 어머니가 정성껏 지으신 오곡밥과 아홉 가지 나물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했습니다.
식구 많은 8남매 집안이라 오곡밥 양도 어마어마한 가마솥 가득이었고, 우리는 부럼을 깨물며 "일 년 내내 무사태평하게 해주세요"라고 소리 높여 빌곤 했습니다. "내 더위 사 가라!"며 서로 더위를 팔고, 오곡밥을 누가 더 많이 먹나 아웅다웅하던 그 소란함... 7살 어린 저에게 그 소란함은 가난을 잊게 하는 따스한 온기였습니다.
"비록 사진은 없지만, 그때 머리 맞대고 밥을 먹던 형제들의 얼굴과 고소한 나물 냄새는 제 가슴 속에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하지만 대보름의 진짜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마을 전체를 뒤흔들던 **'지신밟기'**였습니다. 저 멀리서 꽹과리, 징, 장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면 우리 8남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문 밖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특히 저희 집 마당이 유독 떠들썩했던 아주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저희 아버지가 그 풍물패의 대장이셨거든요!
흰 두루마기를 정갈하게 차려입으시고 장구를 어깨에 메신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참 일품이었습니다. 장구채를 휘두르며 신명 나게 가락을 타실 때면 온 동네 사람들이 넋을 잃고 구경하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뽑아내시던 타령 한 자락에 마당의 흙먼지가 일어나고, 동네 사람들의 어깨춤이 덩실덩실 절로 나던 그 흥겨운 풍경...
요즘도 가끔 TV에서 장사익 님이 노래하시는 모습을 볼 때면, 그 깊은 목소리와 애절한 가락에서 장구 치시던 저희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여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곤 합니다. 7살 어린 딸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온 세상을 들썩이게 하던 최고의 예술가였습니다.
대보름의 축제는 밤이 되어도 끝날 줄 몰랐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지면 우리 동네 아이들은 커다란 다라이(양대야)를 머리에 이고 집집마다 돌아다녔습니다. "보름밥 좀 주세요!" 외치며 얻어온 찰진 오곡밥과 갖가지 나물들을 다라이에 한데 넣고 쓱쓱 비벼 먹던 그 맛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숟가락 하나씩 들고 달빛 아래 둘러앉아 밥을 나눠 먹으며 뭐가 그리 즐거운지 밤새 깔깔거리고 놀던 그 시절... 지금 생각해보면 그 지신밟기와 나눠 먹던 밥 한 그릇은 단순히 노는 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던 따뜻한 품앗이 마음이었습니다.
살면서 35년 자영업의 길에서 마주한 수많은 고비와 시련 속에서도 제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그때 아버지가 마당을 꽝꽝 밟아주던 그 힘찬 장구 소리와 친구들과 나누어 먹은 든든한 밥 한 끼의 기운이 제 몸속에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시골의 겨울은 집집마다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습니다. 8남매 중 일곱째인 저의 기억 속 겨울은, 찬 바람이 부는 계절이 아니라 온 동네가 하나 되어 움직이던 뜨겁고 활기찬 풍경으로 남아 있습니다. 1970년대, 가난했지만 "함께였기에 견딜 수 있었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 봅니다.
추수가 끝나면 마을의 가장 큰 숙제는 우리 집 지붕에 새 옷을 입히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초가집 지붕 잇기는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거대한 작업이었지요. 그래서 온 동네 사람들이 돌아가며 **'품앗이'**를 했습니다. 오늘은 우리 집, 내일은 앞집... 어른들이 지붕 위에 올라가 삭은 이엉을 걷어내고 노란 새 이엉을 얹을 때면, 마을은 온통 고소한 볏짚 냄새로 가득 찼습니다.
마당에서는 아낙들이 정성껏 준비한 새참을 나누며 웃음꽃이 피어났습니다. "올해 지붕도 든든하게 올라갔네!" 하며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던 풍경. 남의 집 일을 내 집 일처럼 돌봐주며 서로가 서로의 비바람을 막아주던 그 따뜻한 공동체 의식이 지금의 각박한 세상에서는 참으로 그립습니다.
지붕을 올리고 남은 볏짚들은 버릴 것이 하나 없었습니다. 그다음 순서는 가마니를 짤 바탕이 되는 새끼줄을 꼬는 일이었습니다. 거친 볏짚을 한 움큼 집어 손바닥 사이에 넣고 '슥슥' 비비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손바닥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따끔거렸습니다.
기계로 돌리는 작업도 있었지만, 세밀한 부분은 여전히 투박한 손바닥의 힘을 빌려야 했습니다. 어린 저는 그 따끔거림이 싫어 투정 부리기도 했지만, 그 고통을 견디며 한 줄 한 줄 단단하게 꼰 줄이 있어야만 무거운 곡식을 든든히 버티는 가마니가 될 수 있었습니다. 35년 장사 인생을 버텨온 제 인내심도 어쩌면 그때 그 발갛게 달아오른 손바닥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붕을 잇고 남은 볏짚으로 가마니를 짜기 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단단한 새끼줄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일일이 손바닥으로 비벼 꼬느라 손바닥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진물이 나기도 했지만, 우리 집에는 이 귀한 새끼 꼬는 기계가 있었습니다. 기계가 돌아가며 볏짚을 빨아들여 매끈하고 탄탄한 새끼줄을 뽑아낼 때면, 어린 마음에도 참 신기하고 든든했습니다. 이 기계 덕분에 우리 아버지는 조금 더 빠르게, 조금 더 많은 새끼줄을 준비하실 수 있었지요. 35년 장사 인생을 돌아보니, 이 기계처럼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며 줄을 뽑아내던 그 성실함이 지금의 저를 만든 뿌리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
새끼줄이 충분히 준비되면 드디어 거대한 가마니 기계가 마루에 자리를 잡습니다. 7살 꼬마의 눈에 그 기계는 집안을 꽉 채울 만큼 거대한 성벽처럼 보였습니다. 아버지가 바디를 '덜컹덜컹' 치실 때마다 온 집안에 진동이 울려 퍼졌고, 그 일정한 리듬에 맞춰 가마니가 한 줄씩 촘촘하게 엮여 나갔습니다.
반농반어촌이었던 우리 마을에서 가마니는 단순한 자급자족을 넘어 소중한 부업거리였습니다. 부지런하셨던 아버지는 겨울내내 쉬지 않고 가마니를 짜서 장터에 내다 파셨습니다. 식구 많은 8남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찬 바람 부는 마루에서 밤새 가마니를 짜던 아버지의 뒷모습... 가난하던 시절이었지만 아버지가 짜 올린 그 가마니에는 우리 가족의 겨울을 지켜준 책임감과 사랑이 담겨 있었습니다.
인생도 어린 시절의 품앗이와 참 닮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도,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손을 보태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5년 침구 사업과 20년 요식업을 거치며 저 역시 수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고, 이제는 제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차례라고 믿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가 서로의 지붕을 이어주었듯, 저 또한 이 블로그에 제 삶의 아픔과 35년의 노하우를 나누며 누군가의 마음 지붕을 잇는 '품앗이꾼'이 되고 싶습니다. 비록 지금의 제 처지가 고단한 겨울 같을지라도, 아버지가 그러하셨듯 다시 정성껏 인생의 가마니를 엮어보려 합니다. 제 이야기가 1970년대를 기억하는 분들께는 따뜻한 향수가, 젊은 세대에게는 끈기 있는 삶의 지혜가 되길 소망합니다.
막둥이를 낳고 이번만큼은 제대로 된 휴식을 꿈꿨습니다. 서른아홉이라는 늦은 나이에 찾아온 귀한 생명이었기에, 앞선 두 딸을 낳고 몸조리도 못한 채 일터로 달려가야 했던 그 서러운 세월을 보상받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야속하게도 이전과 똑같이 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