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9일 월요일

 

친정아버지 장례식날의 서러움, 나는 진심으로 이혼하고 싶었다

내 나이 일곱 살에 엄마를 여의고 8남매 중 일곱째로 자라며 아버지는 내게 세상의 전부와 같았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남편과 시어머니는 단호하게 앞을 막아섰습니다. 당시 일곱 살, 세 살배기였던 우리 딸들을 절대 데려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려서 안 된다는 그 한마디에 핏덩이 같은 자식들을 떼어놓고 혼자 고향으로 향하며, 나는 이 집구석과는 더 이상 인연을 이어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친정아버지 가시는 길에 내 자식들 인사도 못 시키게 하는 그 처사가 너무나 야속하고 기가 막혀, 내려가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고향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본 광경은 내 가슴을 더 후벼팠습니다. 내 동생네 아이들은 우리 딸들보다 더 어렸는데도 다 같이 와서 외할아버지 영정 앞에 엎드려 절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데 "왜 내 자식들만 저 자리에 없나" 싶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상주로서 아버지 곁을 지키며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해야 하는 그 귀한 시간조차, 내 아이들만 쏙 빼놓고 온 그 서러움이 가슴에 단단한 멍으로 남았습니다. 35년 장사하며 험한 일 많이 겪었지만, 가장 슬퍼해야 할 자리에서조차 내 자식들 때문에 죄인처럼 가슴을 졸여야 했던 그때만큼 내가 초라하고 무시당한다고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내 슬픔은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장사한다는 핑계로,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살아생전 아버지께 더 자주 찾아가지 못했던 것이 가슴에 사무치게 후회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잘해드릴걸,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더 챙겨드릴걸 하는 마음에 매 순간 아버지 생각만 나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남편과 시어머니는 그런 나의 애도조차 싫어했습니다. "언제까지 울고 있을 거냐"는 식의 싸늘한 시선 속에서 나는 내 아버지를 잃은 슬픔조차 죄인처럼 숨어서 삭여야 했습니다. 내 부모를 잃은 정당한 슬픔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 집안의 분위기에 나는 진심으로 이혼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무도한 행동의 뿌리에는 평소 시어머니가 입에 달고 살던 무시가 깔려 있었습니다. 친정에 다녀오면 어른들 안부를 묻기는커녕, 경상도 사투리로 "늘기들 잘 있~다~?(늙은이들 잘 있더냐?)"라 부르며 아래로 보던 그 심보가 있었기에, 장례식 날에도 내 자식들의 도리마저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그때 왜 당당하게 "말씀 좀 가려서 하세요"라고 따지지 못했는지, 그 침묵했던 순간들이 62세가 된 지금까지도 자다가 벌떡 일어날 만큼 분하고 억울합니다. 너무 기가 막혀서 "네에~?" 하고 되물으면 그제야 "아니 그냥 잘 있더 


친정아버지 장례식날의 서러움, 나는 진심으로 이혼하고 싶었다

내 나이 일곱 살에 엄마를 여의고 8남매 중 일곱째로 자라며 아버지는 내게 세상의 전부와 같았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남편과 시어머니는 단호하게 앞을 막아섰습니다. 당시 일곱 살, 세 살배기였던 우리 딸들을 절대 데려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려서 안 된다는 그 한마디에 핏덩이 같은 자식들을 떼어놓고 혼자 고향으로 향하며, 나는 이 집구석과는 더 이상 인연을 이어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친정아버지 가시는 길에 내 자식들 인사도 못 시키게 하는 그 처사가 너무나 야속하고 기가 막혀, 내려가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고향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본 광경은 내 가슴을 더 후벼팠습니다. 내 동생네 아이들은 우리 딸들보다 더 어렸는데도 다 같이 와서 외할아버지 영정 앞에 엎드려 절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데 "왜 내 자식들만 저 자리에 없나" 싶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상주로서 아버지 곁을 지키며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해야 하는 그 귀한 시간조차, 내 아이들만 쏙 빼놓고 온 그 서러움이 가슴에 단단한 멍으로 남았습니다. 35년 장사하며 험한 일 많이 겪었지만, 가장 슬퍼해야 할 자리에서조차 내 자식들 때문에 죄인처럼 가슴을 졸여야 했던 그때만큼 내가 초라하고 무시당한다고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내 슬픔은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장사한다는 핑계로,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살아생전 아버지께 더 자주 찾아가지 못했던 것이 가슴에 사무치게 후회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잘해드릴걸,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더 챙겨드릴걸 하는 마음에 매 순간 아버지 생각만 나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남편과 시어머니는 그런 나의 애도조차 싫어했습니다. "언제까지 울고 있을 거냐"는 식의 싸늘한 시선 속에서 나는 내 아버지를 잃은 슬픔조차 죄인처럼 숨어서 삭여야 했습니다. 내 부모를 잃은 정당한 슬픔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 집안의 분위기에 나는 진심으로 이혼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무도한 행동의 뿌리에는 평소 시어머니가 입에 달고 살던 무시가 깔려 있었습니다. 친정에 다녀오면 어른들 안부를 묻기는커녕, 경상도 사투리로 "늘기들 잘 있~다~?(늙은이들 잘 있더냐?)"라 부르며 아래로 보던 그 심보가 있었기에, 장례식 날에도 내 자식들의 도리마저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그때 왜 당당하게 "말씀 좀 가려서 하세요"라고 따지지 못했는지, 그 침묵했던 순간들이 62세가 된 지금까지도 자다가 벌떡 일어날 만큼 분하고 억울합니다. 너무 기가 막혀서 "네에~?" 하고 되물으면 그제야 "아니 그냥 잘 있더냐고" 꼬리를 흐리던 그 모습이 떠올라 자꾸만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이 장사 밑천 빼듯 쉽지 않았던 것은 오로지 아이들 때문이었습니다. 일곱 살, 세 살 된 아이들이 눈에 밟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7살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고 외롭게 자랐던 내 어린 시절의 아픔을 내 아이들에게만은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책임감이, 당장이라도 갈라설 것 같던 내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억척스럽게 살아온 35년 세월이 헛되지 않았음을 박사가 된 딸과 번듯한 아들을 보며 느낍니다. 이 블로그에 내 인생의 아픈 조각들을 적어 내려가는 것은, 그때 억눌렸던 서러움을 이제라도 세상 밖으로 뱉어내어 위로받기 위함입니다. 62세 장사꾼 엄마의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서른아홉 늦둥이의 온기, 그리고 한 달 만에 마주한 차가운 현실

 막둥이를 낳고 이번만큼은 제대로 된 휴식을 꿈꿨습니다. 서른아홉이라는 늦은 나이에 찾아온 귀한 생명이었기에, 앞선 두 딸을 낳고 몸조리도 못한 채 일터로 달려가야 했던 그 서러운 세월을 보상받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야속하게도 이전과 똑같이 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