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20일 화요일

[인생이야기] 마루 끝 아버지의 한숨, 자식과 아내 사이에서 길을 잃다

 마루 끝 아버지의 한숨, 자식과 아내 사이에서 길을 잃다

​여덟 남매로 북적거리던 우리 집도 세월의 흐름 앞에서는 고요해졌습니다.

엄마의 빈자리를 묵묵히 채워주며 동생들을 돌보던 큰언니들이 하나둘 시집을 가고, 집안의 기둥 같던 오빠마저 외지로 직장을 찾아 떠나자 넓던 집안에는 적막함이 찾아왔습니다. 

결국 학교에 다니던 저와 바로 위 언니, 그리고 아직 어린 막내까지 우리 세 자매만이 남아 텅 빈 집안 공기를 견뎌야 했습니다. 북적거림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묘한 쓸쓸함과 앞날에 대한 불안함이었습니다.

​새엄마와의 서먹한 동거, 사춘기의 팽팽한 갈등

​그 무렵, 우리 집에 새로운 어머니가 오셨습니다. 한창 예민하고 감수성 풍부한 학창 시절을 보내던 우리 세 자매에게 '새엄마'라는 존재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거대한 벽과 같았습니다. 

어린 마음에 엄마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 자리를 대신하려는 분을 보니, 공연히 마음이 엇나가고 서운한 감정이 앞섰습니다.

​사소한 생활 습관부터 가치관의 차이까지, 집안에는 매일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새어머니 입장에서도 8남매나 되는 남의 자식을 거두는 일이 결코 쉽지 않으셨을 텐데, 당시 사춘기였던 저희는 그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밥상머리에서의 작은 꾸중도 서럽게만 들렸고, 때로는 날 선 갈등으로 이어지며 집안 분위기는 차갑게 얼어붙곤 했습니다.

​중간에서 애태우던 아버지의 고단한 뒷모습

​지금 돌이켜보니 그 시절 가장 마음고생이 심하셨던 분은 다름 아닌 우리 아버지였습니다.

 딸들이 새엄마와 친딸처럼 화목하게 지내길 간절히 바라셨던 아버지는, 양쪽 사이에서 눈치를 보느라 집에서도 마음 편히 쉬지 못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딸들에게는 엄마 없는 설움이 깊을까 봐 큰 소리로 야단 한 번 치지 못하셨습니다. 

혹여나 야단을 치면 '엄마가 없어서 아버지가 변했다'고 생각할까 봐 늘 미안한 마음을 품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생스러운 8남매 살림을 기꺼이 맡아준 새어머니에게 고마움과 안쓰러움을 동시에 느끼셨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두 갈래 마음 사이에서 매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계셨던 셈입니다.

​마루 끝에 남겨진 아버지의 깊은 한숨과 눈물

​우리가 학교 갈 준비로 바쁘게 움직이며 가방을 챙길 때면, 아버지는 늘 마루 끝에 앉아 먼 산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곤 하셨습니다. "휴우-" 하고 가슴 깊은 곳에서 끌어 올려진 그 무거운 한숨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그때는 그저 아버지가 농사일이 힘드셔서 기운이 없으신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모진 풍파를 다 겪고 예순이 된 지금에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 한숨은 자식과 아내 사이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한 남자의 눈물 섞인 기도였다는 것을요. 35년 자영업을 하며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애써온 지금의 제 모습이 투영되니, 아버지의 그 무거운 어깨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가슴이 아려옵니다.

​이제야 안아드리고 싶은 아버지의 청춘

​여러분에게 아버지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계시나요? 엄격한 호랑이 선생님 같으셨나요, 아니면 한없이 인자한 분이셨나요? 저에게 아버지는 마루 끝에 앉아 한숨을 내쉬던 뒷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뒷모습에 담긴 진심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것 같아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이제는 제가 그때의 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들어보니, 아버지가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오늘 밤에는 꿈속에서라도 마루 끝에 앉아 계신 아버지의 등 뒤로 다가가 "아버지, 그때 참 고생 많으셨어요"라고 따뜻하게 안아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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