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두루마기에 밴 아버지의 판소리와 쓴 술 한 잔
살다 보면 문득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며 떠오르는 얼굴이 있습니다.
제 인생의 커다란 뿌리이자, 여덟 남매라는 거친 가지들을 묵묵히 지탱해 주셨던 나의 아버지입니다. 35년 자영업의 길을 걷는 지금, 문득 그 시절 아버지의 고단했던 어깨가 떠올라 마음의 기록을 남겨봅니다.
장사익의 소리로 깨어난 아버지의 기억
얼마 전 유튜브에서 장사익 선생님의 공연을 보았습니다.
정갈한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무대 위에서 온몸으로 소리를 쏟아내는 그분의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순간, 저는 그대로 멈춰 서서 한참을 울고 말았습니다.
그 절절한 소리와 휘날리는 옷자락이 자꾸만 저의 아버지를 불러냈기 때문입니다.
마을의 소리꾼, 그러나 홀로 남겨진 외로운 기둥
사실 아버지는 마을에 제사가 있거나 큰일이 생길 때면 하얀 두루마기를 정갈하게 차려입으시고 멋드러지게 판소리를 뽑으시던 소리꾼이셨습니다.
마을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소리를 하시던 그 기개 높은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하지만 제가 일곱 살 되던 해, 엄마가 세상을 떠나신 후 아버지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줄줄이 딸린 여덟 아이를 홀로 책임져야 하는 외로운 기둥이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과 여덟 남매를 먹여 살려야 하는 막막함. 그 무거운 삶의 무게를 아버지는 술로 견뎌내셨습니다.
술을 못 하시던 분이 배운 '쓴 잔'의 의미
우리 남매들은 체질적으로 술을 전혀 못 마십니다.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금세 붉어지는데, 이것도 아버지를 꼭 닮았습니다. 평생 술을 멀리하셨다던 아버지가 엄마를 보내신 후 뒤늦게 술을 배우신 것도, 아마 맨정신으로는 그 적막한 집안과 고단한 삶을 견뎌낼 재간이 없으셨기 때문이겠지요.
아버지는 저녁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낮은 목소리를 빌려 무언가를 자주 읊조리셨습니다.
어린 마음엔 그저 노래인 줄 알았는데,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것은 차마 밖으로 뱉지 못한 가장의 한숨이었고, 먼저 떠난 아내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이었습니다.
장사익의 소리를 들으며 떠올린 아버지의 뒷모습. 정갈한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마을의 큰일을 도맡아 판소리를 하시던 아버지의 기개와 고독을 담아낸 이미지입니다."
대를 이어 흐르는 하얀 두루마기의 정신
세월이 흘러 이제 아버지는 계시지 않지만, 명절이나 제사가 돌아오면 저는 다시 아버지를 만납니다. 아버지가 그토록 아끼시던 그 하얀 두루마기를 이제는 저의 오빠가 물려받아 정성스레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루마기를 입고 제례를 올리는 오빠의 뒷모습에서, 저는 마을을 호령하던 소리꾼 아버지와 쓴 술 한 잔에 눈물을 삼키던 고독한 아버지를 동시에 봅니다. 사춘기 시절 새어머니와의 갈등 속에서도 묵묵히 우리 여덟 남매를 지켜주셨던 그 강인하고도 외로웠던 뒷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보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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