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야기] 사라진 울진 염전마을의 여름, 8남매가 노 저어 떠나던 바다 원정기
안녕하세요. 지난번에는 우리 고향에서 감자가루 만들던 추억을 올렸는데, 오늘은 우리 8남매의 시끌벅적했던 여름 휴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매년 여름 휴가철, 객지에 나갔던 언니들이 고향 집으로 하나둘 내려오면, 울진 수산리 염전마을 저희 집은 금세 왁자지껄한 축제 마당이 되었습니다. 그 시절 우리 자매들의 가장 큰 연중행사는 배를 타고 이웃 동네로 피서를 가는 '바다 원정길'이었습니다.
1. 19가구 마을의 유일한 보물, 노 젓는 배를 타고 떠나던 길
제가 나고 자란 수산리 염전마을은 19가구가 오순도순 모여 살던 정겨운 곳이었습니다. 지금은 엑스포 공원이 들어서서 옛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제 기억 속엔 19가구 집집마다 저녁나절 피어오르던 연기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우리 동네 앞바다는 끝없이 펼쳐진 고운 백사장이라 놀기엔 좋았지만, 따개비를 따거나 바위 틈에서 고동을 잡으며 놀려면 바위가 많은 이웃 동네로 '배'를 타고 나가야만 했습니다.
우연히 앨범을 뒤지다 발견한 사진 속에는 동네의 유일한 배가 찍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배 한 척에 온 식구가 올라타고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엔진 소리 하나 없이 오로지 오빠와 언니들이 힘차게 젓는 노 소리만 '삐걱, 삐걱' 들려오던 그 고요한 바다길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우연히 낡은 앨범을 뒤적이다 이 사진을 발견하고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사진 속에 보이는 저 투박한 나무배는 당시 우리 수산리 염전마을 19가구가 공동으로 아끼던 유일한 이동 수단이었습니다. 요즘처럼 기름으로 가는 엔진 배가 아니라, 오빠들이 땀 흘리며 직접 노를 저어야만 나아갔던 정직한 배였지요. 8남매가 옹기종기 배에 올라타면 노가 물을 젓는 '삐걱, 삐걱' 소리가 정겹게 들려왔고, 배 밑으로는 울진 바다의 투명한 속살과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훤히 들여다보였습니다. 지도에서는 사라진 고향이지만, 이 사진 속 텍스트를 따라가다 보면 제 가슴 속엔 여전히 그해 여름의 짭조름한 소금기가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
2. 공석리에서 현내리까지, 투명한 바다 밑을 지나던 설렘
매년 여름, 우리의 목적지는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어느 해에는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공석 바닷가로 향했습니다. 또 어느 해에는 조금 더 멀리 현내리까지 파도를 넘어갔지요. 어렸던 저는 배를 타고 깊은 바다로 나갈 때면, 너무 투명해서 오히려 무서울 정도로 깊어 보이는 바다 밑을 내려다보며 배멀미를 견뎌내곤 했습니다.
바다 밑으로는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들이 하나하나 다 보일 정도로 물이 맑았습니다. 햇살이 바다 깊숙이 내리쬐면 모래바닥의 물결무늬까지 선명하게 보였지요. 현대식 모터배가 아닌, 사람의 힘으로 노를 저어 가던 그 느릿한 항해는 어린 제게 세상에서 가장 짜릿한 모험이었습니다.
3. 외갓집 연지리 바닷가에서의 이 시린 수박 한 조각
가장 기억에 남는 원정은 외갓집이 있는 연지리로 가던 해였습니다. 외갓집 식구들의 환대를 받으며 연지리 바닷가 바위 틈에서 따개비를 따고, 언니들과 물놀이를 하던 그 시간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었습니다. 파도가 치는 바위틈에 수박을 끈으로 묶어 담가두었다가, 이가 시릴 정도로 시원해졌을 때 쪼개 먹던 그 맛은 35년 넘게 식당을 운영해온 저로서도 잊을 수 없는 '인생의 맛'입니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배를 타고 나갔던 그 평화로운 바다와, 8남매가 한데 어우러져 웃던 그 시절이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그때는 이 행복이 영원할 줄 알았고, 우리 마을이 지도에서 사라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4. 사라진 마을, 가슴 속에만 남은 영원한 고향
이제 그 19가구가 살던 수산리 염전마을은 지도에서 영영 사라졌습니다. 공원이 들어서면서 정들었던 이웃들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우리 남매들을 귀여워해 주시던 동네 어르신들도 이제는 거의 다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고향 땅을 다시 밟아도 반겨줄 사람 하나 없는 낯선 풍경이 되었지만, 제 마음속에는 여전히 연지리 외갓집의 따뜻함과 현내리 바다의 시원함이 그대로 살아 숨 쉽고 있습니다.
장사 인생 35년, 고단한 삶의 고비마다 저를 웃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삐걱'이는 노 소리와 함께했던 여름날의 기억입니다. 여러분의 기억 속에도 이제는 사라졌지만 가슴 속엔 선명한 '여름의 한 페이지'가 있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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