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25일 일요일

[인생이야기] 곰팡이 핀 떡보다 차가웠던 외면, 엄마 없는 일곱 살의 첫 소풍.

[인생이야기] 곰팡이 핀 떡보다 차가웠던 외면, 엄마 없는 일곱 살의 첫 소풍

어린 시절의 기억은 대부분 안개 속처럼 희미합니다. 7살에 엄마를 여의고 앞만 보고 살아온 고달픈 세월 탓인지, 기억의 페이지들은 빛바랜 사진처럼 지워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첫 소풍날의 기억만큼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슴 한구석에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아니, 차라리 잊혔으면 좋았을 만큼 시리고 아픈 기억입니다.

1. 화사한 돗자리 사이로 스며든 일곱 살의 외로움

그날은 온 동네 엄마들이 화사한 옷을 입고 정성껏 싸온 도시락을 들고 따라오던 잔칫날 같았습니다. 연두색으로 물든 들판 위로 화려한 돗자리들이 꽃처럼 깔리고, 친구들은 엄마들과 삼삼오오 무리 지어 재잘거리며 웃음꽃을 피웠습니다. 하지만 엄마 없는 8남매 중 일곱째인 저에게 그 풍경은 다른 세상 이야기였습니다.

엄마들과 모여 앉아 정답게 밥을 먹는 그 따스한 풍경이 너무나 부러워, 저는 멀찍이 서서 멍하니 그쪽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밥 한 술보다 엄마의 따뜻한 손길이 더 고팠던 그때, 제 귀에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박혔습니다. "에고, 저 집 애들 좀 봐... 엄마도 없이 소풍을 왔으니 어쩌나..." 동정 어린 그 말조차 어린 가슴에는 비수처럼 꽂혔습니다.

2. 큰엄마의 인색한 손길과 종갓집의 그늘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우리 큰엄마는 그 안쓰러운 수군거림을 듣고도 못 들은 척, 애써 고개를 돌려버리셨습니다. 언니와 저, 엄마 잃은 조카들을 한 번쯤은 챙겨주실 법도 한데, 큰엄마의 그 차가운 외면은 어린 마음을 더욱 얼어붙게 했습니다. 당시 큰집은 19가구뿐인 작은 동네에서 가장 부유한 편에 속했습니다. 종갓집이라 제사도 일 년에 열 번 넘게 지냈고, 먹을 것이 부족하던 그 시절 제삿날은 우리 남매들에게 유일한 잔칫날 같았습니다.

떡이며 과일이며 그날만큼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큰엄마는 참 인색하셨습니다. 제사 지내고 남은 떡에 파란 곰팡이가 피어 버려질지언정, 엄마 잃고 배고픈 조카들에게는 단 한 조각도 내어주지 않으셨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동정보다, 피를 나눈 친척 어른의 그 차가운 외면과 인색함이 일곱 살 제 가슴에는 지워지지 않는 시퍼런 멍으로 남았습니다.

3. 언니와 함께 울며 삼킨 그늘진 구석의 도시락

부러움과 서러움이 뒤섞인 눈으로 화려한 돗자리 쪽을 바라보던 제 손을, 누군가 홱 낚아채듯 잡아끌었습니다. 바로 우리 언니였습니다. 엄마들 틈에서 기죽어 있는 동생의 눈빛이 너무나 안쓰러워, 언니는 제가 그 행복한 풍경을 더 보지 못하도록 사람 없는 나무 그늘 구석으로 저를 데려갔습니다.

화려한 꽃들 대신 칙칙한 흙바닥에 앉아, 언니와 저는 서로를 바라보며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서러운 눈물이 섞여 들어간 도시락을 함께 먹던 그 소풍날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하지만 그 시절 엄마 없는 설움이 사무치던 그 아픔은, 역설적으로 제가 35년 넘게 자영업의 모진 풍파를 견디고 인내하게 만든 가장 단단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오늘따라 그늘진 구석에서 울고 있던 어린 저와 언니를 꼭 안아주고 싶습니다. "그 눈물이 너를 이렇게 강한 사람으로 만들었단다"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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