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야기] 8월의 뙤약볕보다 뜨거웠던 눈물, 서러운 산후조리의 기록
둘째 아이를 낳고 집에서 몸조리를 하던 그해 8월은 유독 무덥고 길었습니다. 가만히 누워 있어도 땀이 흐르는 삼복더위 속에 갓 난 아이를 안고 돌아온 집은 축복보다는 견디기 힘든 인내의 공간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시설 좋은 산후조리원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집에서 시어머니의 산바라지를 받았지만, 그 시간은 따뜻한 돌봄보다는 소외감과 서러움의 연속이었습니다. 7살에 엄마를 여읜 일곱째 딸에게 친정엄마 없는 산방은 뙤약볕보다 더 시리게 다가왔고, 저는 제 집 안방에서도 마음 편히 누워 있지 못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아들만 귀히 여겼던 시어머니와 효자 남편 사이의 소외감
시어머니께서는 대기업에 다니는 당신 아들을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로 여기셨습니다. 첫째 때와 마찬가지로 집으로 오셔서 산바라지를 해주셨지만, 시어머니의 모든 관심과 정성은 오로지 아들에게만 향해 있었습니다. 남편 또한 유독 효심이 깊어 퇴근 후면 시어머니 곁에 붙어 앉아 온갖 집안 사정과 속상한 이야기들을 미주알고주알 다 받아주었습니다. 모자 사이의 살가운 대화가 거실을 가득 채우는 동안, 방 안에 홀로 누워 있던 저는 철저히 소외되었습니다. 남편이 산모인 제 마음을 먼저 헤아려주기보다 어머니의 말 상대가 되어주는 것을 보며, 저는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외로움을 삭여야 했습니다.
방문 너머로 들리는 며느리 흉, 나를 만만하게 본 기막힌 처사
그 무더운 여름날, 저를 가장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은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거실에 나란히 앉아 나누는 대화였습니다. 제가 방 안에 누워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마치 제가 없는 사람인 양 제 흉을 보곤 했습니다. "산후조리해주러 왔으면서도 이런 건 지가 해도 될 텐데 꼼짝도 않는다"며 산모인 제 살림이나 태도를 비꼬는 말들이 방문을 넘어 선명하게 꽂혔습니다. 들으라고 일부러 하는 그 무례한 말들은 저를 얼마나 만만하게 보고 무시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막힌 처사였습니다. 시어머니는 효자 아들의 유세를 등에 업고 기세등등하셨고, 저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까지 짓밟히는 기분이 들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안하무인 시누이와 똑부러지게 말 못 했던 바보 같은 인내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며 제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시누이 또한 저를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성격이 유별나고 안하무인이었던 시누이는 시어머니의 유세에 장단을 맞추며 제 자존감을 깎아내렸습니다. 요즘 세대 사람들처럼 자기주장을 똑부러지게 하고 "남의 흉을 보려면 나가서 보라"고 당당히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저는 워낙 내성적인 탓에 그저 묵묵히 참는 것밖에 할 줄 몰랐습니다. 기가 막히고 기분 나쁜 소리를 들어도 행여나 집안이 시끄러워질까 봐 입을 굳게 닫고 살았던 제가 참 바보 같았습니다. 친정엄마가 계셨더라면 제 편이 되어 이 모진 소리들을 막아주셨을 텐데 싶어, 밤마다 갓 난 아이를 안고 소리 없이 눈물을 삼켰습니다.
묵묵히 견뎌낸 서러움이 남긴 삶의 맷집과 오기
돌아보면 그 시절의 저는 참으로 미련할 만큼 참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 지독한 소외감과 대놓고 무시당하던 경험은 역설적으로 저를 강하게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못 하고 묵묵히 견뎌내던 그 인내심은 훗날 제가 35년 넘게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단단한 맷집이 되었습니다. 비록 과정은 서러웠지만, 그 고통을 뚫고 지나온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똑부러지지 못해 서러웠고, 남편이 원망스러워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참아야 했던 이 사실적인 기록이 저와 비슷한 길을 걸어온 누군가에게 작은 공감과 다시 일어설 용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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