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일 월요일

[인생 이야기]시어머니의 위대한 헌신, 그러나 남겨진 '가정교육'의 뼈아픈 빈자리

[인생 이야기]시어머니의 위대한 헌신, 그러나 남겨진 '가정교육'의 뼈아픈 빈자리

1. 7살에 멈춰버린 우리 부부의 유년기

​참 기구한 인연입니다.
 저도 7살에 엄마를 잃었고, 제 남편도 7살에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똑같이 부모 한쪽을 잃은 결핍을 안고 만났지만, 그 상처를 대하는 집안의 태도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저는 8남매 중 일곱째로 자라며 "엄마 없는 자식 소리 듣지 마라"는 말을 뼈에 새기며 살았습니다. 
남들보다 더 깍듯하게 인사하고, 더 부지런히 움직이며 제 자존심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집안은 그 비극을 거친 무질서로 채워나갔습니다.

​2. 재가도 하지 않고 4남매를 거둔 시어머니의 위대함

​사실 며느리인 제가 봐도 제 시어머니는 참으로 대단하고 위대한 분이십니다. 
7살 어린 아들을 포함해 4남매를 두고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젊은 나이의 시어머니는 재가도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식들을 위해 인생을 바치셨습니다. 
시장통 생활전선에서 거친 풍파를 온몸으로 맞으며 그 어린것들을 굶기지 않고 다 키워내신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숭고한 헌신입니다. 
그 억척스러운 세월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 남편도 없었겠지요.

​3. 헌신 속에 놓쳐버린 '예의'라는 가장 큰 유산

​하지만 저는 지금도 자꾸만 되묻게 됩니다. 그토록 자식들을 사랑하셨다면, 왜 그들을 더 엄하게 가르치지 못하셨을까요. 
자식들을 굶기지 않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 노릇'을 가르치는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시어머니가 밖에서 장사하며 고생하시는 동안, 4남매는 집안에서 예절도 도리도 배우지 못한 채 방치되었습니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시어머니는 그럴수록 자식들의 예의를 더 매섭게 잡아주셨어야 했습니다.

​4. 살아남은 자가 느끼는 지독한 예의의 부재

​남편과 그 형제들은 부모의 보살핌 대신 각자 알아서 살아남는 법만 배웠습니다. 
그 결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말 한마디의 무게를 전혀 모르는 어른들로 자라버렸습니다.
 제가 35년 장사 인생을 살며 가장 힘들었던 건 손님들의 갑질이 아니었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선을 넘고 무례하게 구는 시댁 식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부모가 없어서 그렇다는 핑계를 대지만, 저 역시 엄마 없이 자랐기에 그 말이 얼마나 비겁한 변명인지 너무나 잘 압니다.

​5. 35년, 이 척박한 환경에서 내가 살아남은 이유

​결혼과 동시에 시작된 장사, 그리고 그보다 더 고달팠던 예의 없는 집안에서의 생활. 저는 지금도 말합니다. 
"나는 이 집안에서 살아남았다"고요. 
시어머니의 헌신은 고맙고 위대하지만, 그로 인해 면죄부를 받은 남편 식구들의 무례함은 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었습니다. 
저는 제 아이들에게만큼은 절대로 이 굴레를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35년 세월 동안 제 자존심을 지켜왔습니다. 
이제 이 굴곡진 기록을 통해, 7살에 엄마 여읜 소녀가 어떻게 그 척박한 곳에서 반듯한 나무로 살아남았는지 하나씩 풀어내려 합니다.

​"제가 이 모진 세월을 하나하나 기록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저처럼 엄마 없는 서러움을 장사로 달래며, 예의 없는 환경 속에서 억울하게 자신을 깎아 먹으며 사는 사람이 더는 없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제 못난 인생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넘어지지 않는 지팡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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