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4일 수요일

[인생 이야기]나이 똑같은 형님, 나, 시누이... 왜 나는 그들에게 항상 '만만한 남'이었을까

[인생 이야기]나이 똑같은 형님, 나, 시누이... 왜 나는 그들에게 항상 '만만한 남'이었을까

1. 친정엄마라는 빈자리를 정성으로 채우려 했던 진심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8남매 사이에서 자란 저에게 '어머니'라는 존재는 평생을 따라다니는 아련한 그리움이었습니다. 
결혼 후 만난 시어머니를 보며 저는 다짐했습니다. '내 친정엄마처럼 모시자, 내가 정성을 다하면 이분도 나를 딸처럼 아껴주시겠지'라고요. 
8남매 틈바구니에서 몸에 밴 인내와 배려를 시댁에서도 고스란히 발휘하며, 저는 누구보다 착한 며느리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수한 정성은 저의 가장 큰 약점이 되어 돌아왔고, 저를 향한 부당한 대우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2. 도시 깍쟁이 형님과 시골 출신 둘째 며느리

​저희 시댁에는 참 보기 드문 인연이 있었습니다. 맏며느리인 형님과 나, 그리고 손아래 시누이까지 세 명의 나이가 똑같았던 것입니다. 동갑내기 세 여자가 한 집에 모였으니 남들은 친구처럼 지낼 법도 하다고 했지만, 시어머니의 잣대는 냉정했습니다.
​형님은 세련된 도시 여자였습니다. 
은근히 깍쟁이 기질이 있어 자기 실속을 똑 부러지게 챙겼고, 장남인 아주버님 또한 기세가 당당해 시어머니조차 형님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늘 눈치를 보셨습니다.
 반면 시골 출신인 저는 시어머니 눈에 그저 만만하고 부리기 좋은 둘째 며느리일 뿐이었습니다. 도시 깍쟁이 형님은 어려워서 대접해주고, 시골 출신인 저에게는 마음 놓고 감정을 쏟아내는 차별이 일상이었습니다.

​3. 그 시절 어느 집이나 비슷했던 '끼인 둘째'의 비애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시댁만 그랬던 건 아닐 겁니다.
 그 시절 어느 집이든 장남은 집안의 기둥 대접을 받았고, 막내는 그저 늦둥이라 깨물면 아픈 손가락처럼 귀함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그 사이에 낀 둘째였습니다. 
딸 하나에 아들 셋인 집안에서 둘째 아들과 결혼한 저는, 시어머니에게 가장 '편한' 존재이자 화풀이 대상이었습니다.
​남편 또한 결혼하자마자 지극한 효자가 되어 저에게 매일 시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하라고 강요하며 본인의 효도를 며느리인 저에게 떠넘겼습니다. 
60만 원 삭월세에서 시작해 장사 밑천을 모으느라 손등이 터져가며 일하던 시절, 남편은 제 고생보다 자기 엄마와 동생의 기분을 딸보다 더 조근조근 맞춰주는 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아들이 내 편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시어머니의 의기양양함은 대단했습니다.
그시절  시어머니들이 다 그랬을까요?

4. 아직 아이도 없던 시절, 왜 나는 도망치지 못했을까

​참 바보 같았습니다.
 아직 아이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왜 그 부당한 대우를 다 견디며 살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만약 그때 제가 지금처럼 세상을 알았거나 조금 더 영악했더라면, 그 모진 시집살이를 시작도 안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엄마 없는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가정을 지키고 싶었고, 그 착한 마음이 결국 저를 '무시해도 되는 남'으로 만들었습니다.
​친정엄마가 계셨더라면 "너 왜 그러고 사느냐"며 제 손을 잡아 끌어주셨을까요?
시어머니께 다했던 그 무수한 진심이 서러움으로 돌아왔을 때의 허망함은 35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한구석에 시린 흉터로 남아있습니다. 
이제는 그 서러웠던 시절의 저를 안아주며, 제 인생의 주인으로서 이 아픈 기록들을 하나씩 남겨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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