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이야기]나이 똑같은 형님, 나, 시누이... 왜 나는 그들에게 항상 '만만한 남'이었을까
1. 친정엄마라는 빈자리를 정성으로 채우려 했던 진심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8남매 사이에서 자란 저에게 '어머니'라는 존재는 평생을 따라다니는 아련한 그리움이었습니다.
결혼 후 만난 시어머니를 보며 저는 다짐했습니다. '내 친정엄마처럼 모시자, 내가 정성을 다하면 이분도 나를 딸처럼 아껴주시겠지'라고요.
8남매 틈바구니에서 몸에 밴 인내와 배려를 시댁에서도 고스란히 발휘하며, 저는 누구보다 착한 며느리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수한 정성은 저의 가장 큰 약점이 되어 돌아왔고, 저를 향한 부당한 대우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2. 도시 깍쟁이 형님과 시골 출신 둘째 며느리
저희 시댁에는 참 보기 드문 인연이 있었습니다. 맏며느리인 형님과 나, 그리고 손아래 시누이까지 세 명의 나이가 똑같았던 것입니다. 동갑내기 세 여자가 한 집에 모였으니 남들은 친구처럼 지낼 법도 하다고 했지만, 시어머니의 잣대는 냉정했습니다.
형님은 세련된 도시 여자였습니다.
은근히 깍쟁이 기질이 있어 자기 실속을 똑 부러지게 챙겼고, 장남인 아주버님 또한 기세가 당당해 시어머니조차 형님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늘 눈치를 보셨습니다.
반면 시골 출신인 저는 시어머니 눈에 그저 만만하고 부리기 좋은 둘째 며느리일 뿐이었습니다. 도시 깍쟁이 형님은 어려워서 대접해주고, 시골 출신인 저에게는 마음 놓고 감정을 쏟아내는 차별이 일상이었습니다.
3. 그 시절 어느 집이나 비슷했던 '끼인 둘째'의 비애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시댁만 그랬던 건 아닐 겁니다.
그 시절 어느 집이든 장남은 집안의 기둥 대접을 받았고, 막내는 그저 늦둥이라 깨물면 아픈 손가락처럼 귀함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그 사이에 낀 둘째였습니다.
딸 하나에 아들 셋인 집안에서 둘째 아들과 결혼한 저는, 시어머니에게 가장 '편한' 존재이자 화풀이 대상이었습니다.
남편 또한 결혼하자마자 지극한 효자가 되어 저에게 매일 시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하라고 강요하며 본인의 효도를 며느리인 저에게 떠넘겼습니다.
60만 원 삭월세에서 시작해 장사 밑천을 모으느라 손등이 터져가며 일하던 시절, 남편은 제 고생보다 자기 엄마와 동생의 기분을 딸보다 더 조근조근 맞춰주는 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아들이 내 편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시어머니의 의기양양함은 대단했습니다.
그시절 시어머니들이 다 그랬을까요?
4. 아직 아이도 없던 시절, 왜 나는 도망치지 못했을까
참 바보 같았습니다.
아직 아이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왜 그 부당한 대우를 다 견디며 살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만약 그때 제가 지금처럼 세상을 알았거나 조금 더 영악했더라면, 그 모진 시집살이를 시작도 안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엄마 없는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가정을 지키고 싶었고, 그 착한 마음이 결국 저를 '무시해도 되는 남'으로 만들었습니다.
친정엄마가 계셨더라면 "너 왜 그러고 사느냐"며 제 손을 잡아 끌어주셨을까요?
시어머니께 다했던 그 무수한 진심이 서러움으로 돌아왔을 때의 허망함은 35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한구석에 시린 흉터로 남아있습니다.
이제는 그 서러웠던 시절의 저를 안아주며, 제 인생의 주인으로서 이 아픈 기록들을 하나씩 남겨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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