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3일 화요일

좁은 아파트, 네 아이의 울음소리와 참아내야 했던 한숨

좁은 아파트, 네 아이의 울음소리와 참아내야 했던 한숨

둘째를 낳고 한 달 만에 홈패션 가게로 돌아온 제 일상은 그야말로 전쟁터였습니다. 당시 친정아버지는 수술 후 대구 언니 집에서 항암 치료를 받으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계셨습니다. 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아버지의 부재는 제 마음을 텅 비게 만들었지만, 슬퍼할 겨를도 없이 저를 기다리는 건 숨 막히는 집안 현실이었습니다. 남편의 고집으로 모셔온 시어머니와의 합가는 상상 이상의 스트레스였고, 갓 해산한 몸으로 시어머니 눈치를 보며 살림을 챙겨야 했던 그 시간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듯 위태로웠습니다.

무엇보다 저를 미치게 했던 건 집안을 가득 채운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이었습니다. 우리 집에는 이제 겨우 여섯 살 된 큰애와 갓난쟁이 둘째가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던 시누이는 자기 집 애들 둘을 시도 때도 없이 저희 집에 맡기곤 했습니다. 좁은 아파트 거실은 순식간에 아이 셋, 네 명의 울음소리와 장난감으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내 아이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산달에, 조카들까지 줄줄이 떠맡게 된 현실이 참으로 가혹했습니다. 낮에는 가게에서 재봉틀과 씨름하고, 밤에는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넋이 나간 채 하루를 버텨야 했습니다.

워낙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잘 참는 성격이라 겉으로는 묵묵히 그 소란을 다 받아냈지만, 제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습니다. 가게에서 손님들 이불을 지으며 온종일 기운을 다 빼고 녹초가 되어 돌아와도, 집은 편히 쉴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시어머니는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고생하신다며 제가 오기만을 기다리셨고, 저는 앞치마를 벗기도 전에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 저녁을 짓고 아이들을 씻겨야 했습니다. 시누이는 같은 단지에 살면서도 미안한 기색 없이 아이들을 맡겼고, 저는 거절 한마디 못 한 채 그 무거운 짐을 다 짊어졌습니다. 제 몸 하나 추스를 틈 없이 남의 집 아이들까지 돌보며 북적거리는 거실 한복판에 서 있을 때면, 지독한 외로움이 밀물처럼 밀려오곤 했습니다.

그 시절 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남편의 무심함이었습니다. 집안이 아이들 소리로 시끌벅적하니 남편은 그저 '사람 사는 집 같다'며 허허거렸지만, 그 소란을 지키기 위해 제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삼키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시어머니와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생겨도, 시누이네 아이들 때문에 제 아이가 뒷전으로 밀려나도 저는 그저 '내가 조금 더 고생하고 말지' 하는 마음으로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대구에서 투병 중이신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집안 시끄럽게 불평을 늘어놓을 수는 없었기에, 그 모든 화와 스트레스를 가슴 깊은 곳에 꾹꾹 눌러 담으며 버텼습니다. 꾹 참는 것이 미덕이라 믿었던 그 성미가 그때는 제 스스로를 갉아먹는 독이 되고 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모진 세월을 어떻게 견뎠나 싶습니다. 대구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걱정과 시어머니와의 불편한 동거, 그리고 내 아이와 조카들까지 뒤엉킨 그 아수라장 속에서 저는 엄마라는 이름 하나로 그 모든 풍파를 온몸으로 막아냈습니다. 35년 장사 인생 중 가장 어둡고 긴 터널 같았던 그 시절, 차가운 재봉틀 소리만이 제 서러운 마음을 알아주는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비록 제 젊음은 그렇게 희생과 인내로 채워졌지만, 그 시절의 모진 바람을 견뎌냈기에 지금의 제가 이토록 단단해질 수 있었음을 이제는 압니다. 그 북적이는 소란 속에서도 기어이 가정을 지켜낸 제 자신이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론 참 가슴이 아릿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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