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3일 금요일

[인생 이야기] 35년 전, 양수 터지는 줄도 모르고 바느질하던 그날의 출산기

[인생 이야기] 35년 전, 양수 터지는 줄도 모르고 바느질하던 그날의 출산기

​남자들은 모이면 군대 시절 고생한 이야기를 훈장처럼 늘어놓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 여자들에게는 그보다 더 치열하고 생생했던 '출산'이라는 인생의 전장이 있습니다. 
가르쳐주는 이 없어도 본능으로 견뎌냈던, 제 인생의 첫 번째 출산 이야기를 담담히 기록해 보려 합니다.

​홈패션 작업대 앞에서의 만삭의 하루

7살 어린 나이에 친정엄마를 여의고 새어머니 밑에서 자란 저에게 ‘출산’은 막막한 숙제와 같았습니다.
 35년 전, 첫 딸을 가졌을 때 저는 홈패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좁은 작업실에서 만삭의 몸으로 원단을 끊고 미싱을 돌리며 하루를 보냈지요. 
그때는 양수가 터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몰랐습니다. 
그저 몸이 조금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낳으러 가기 직전까지 작업대 앞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하리만큼 용감했던 초보 엄마였습니다.

"든든히 먹어야 힘을 쓰지!" 이웃 아주머니의 조언

진통이 간간이 밀려오는데 가게를 지나던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제 배를 보더니 깜짝 놀라시더군요. 
"새댁, 애 낳으러 갈 때 배고프면 힘 없어서 못 낳아. 무조건 든든히 먹고 가!" 친정엄마가 계셨다면 "너무 많이 먹으면 나중에 고생한다"고 일러주셨겠지만, 저는 그 아주머니 말씀이 정답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 말만 믿고 밥을 꾹꾹 눌러 한 그릇 든든하게 먹고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관장과의 사투, 그리고 엄마의 기도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의사 선생님의 호통이 떨어졌습니다. 
"양수가 이미 다 터졌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참았느냐"는 것이었죠. 
그 당혹감도 잠시, 든든하게 먹고 온 밥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사실 애 낳는 고통보다도 관장 때문에 정신없이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게 훨씬 더 힘들고 진이 빠졌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제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습니다. 
"하나님, 제발 우리 아기만 무사히 나오게 해주세요. 
저는 아무리 아파도 괜찮으니 우리 아이만 건강하게 해주세요." 
내 몸이 타 들어가는 아픔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습니다.
 엄마가 된다는 건, 나보다 내 안의 생명을 더 귀하게 여기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습니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홀로 선 첫걸음

친정엄마의 따뜻한 조언 한마디 없었지만, 저는 몸으로 직접 부딪치며 엄마가 되는 법을 배웠습니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었고, 때로는 외로움이 스승이었습니다. 
밥 많이 먹고 가서 고생했던 그 서툴렀던 초보 엄마는, 그날 이후 비로소 한 아이를 책임지는 단단한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삶의 어떤 순간에도 "할 수 있다"고 외치게 된 저의 강인함은 아마 그 서툴렀던 첫 출산의 기억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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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 9일 월요일

[인생 이야기] 노란 위액을 토하며 견뎠던 그 시절, 당연하지 않았던 인내

[인생 이야기] 노란 위액을 토하며 견뎠던 그 시절, 당연하지 않았던 인내

​35년 장사 인생을 돌아보면 참 모진 세월을 잘도 버텼다 싶습니다. 
하지만 그 맷집 좋던 저도 문득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기억이 있습니다. 
바로 첫딸을 임신했을 때, 지독했던 멀미와 입덧을 견디며 시댁으로 향하던 그 길에 대한 기록입니다.

​1. 비포장도로 위, 지옥 같았던 시외버스 60분

​저는 본래 차 멀미가 유독 심한 체질입니다. 
지금도 차만 타면 속이 울렁거려 대중교통 이용이 쉽지 않은데, 당시 임신 입덧까지 겹친 상태에서의 버스 이동은 말 그대로 '고문'이었습니다. 
그 당시엔 자가용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 시외버스를 타고 40분을 달려가, 다시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20분을 더 가야 시댁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도로는 지금처럼 매끄럽지 않았습니다.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의 진동, 그리고 차 안을 가득 채운 독한 경유 냄새는 제 감각을 마비시켰습니다. 
10분만 지나도 식은땀이 비 오듯 흐르고 눈앞이 노랗게 변했습니다. 
뱃속 아이를 생각해 뭐라도 먹어야 했지만, 입덧 때문에 속은 이미 비어 있었고 나올 것이 없는데도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노란 쓴물이 올라올 때까지 구역질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노란 위액을 토해내며 간신히 버티던 그 60분은 제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이었습니다.

​2. 도착한 시댁, 쉴 곳 없던 며느리의 주방

​기진맥진해서 시댁 대문을 들어서면 당장이라도 차가운 방바닥에 쓰러져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임산부 며느리를 위한 배려는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멀미로 하얗게 질린 제 얼굴을 보며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시댁 오기 싫어서 일부러 꾀병 부리는 것 아니냐"는 차가운 말들을 던졌습니다.
​그 서슬 퍼런 눈치 속에서 저는 눕는 대신 주방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속은 여전히 뒤집혀 비릿한 음식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이 올라왔지만, 주방 한구석에서 설거지를 하고 나물을 다듬으며 일손을 보탰습니다. "나도 사람인데, 나도 임신해서 힘든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8남매 중 일곱째로 자라며 배운 '인내'라는 굴레가 제 입을 꾹 닫게 만들었습니다.


​3. 가장 가까운 보호자, 남편의 야속한 외면

​가장 야속한 것은 단연 남편이었습니다. 
버스 안에서 제가 노란 쓴물을 쏟아내며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옆에서 지켜본 유일한 목격자가 바로 남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댁 식구들이 저를 꾀병으로 몰아세울 때, 남편은 제 편이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본인 어머니의 말에 동조하며 저를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아내의 하얗게 질린 입술보다 어머니의 기분을 살피는 것이 효도라고 믿었던 그 사람. 가장 의지해야 할 남편이 '남의 편'이 되어 저를 사지로 몰아넣는 것 같은 기분은 노란 위액보다 더 쓰고 비참하게 가슴에 남았습니다. 
요즘 세상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당시의 제 남편은 유독 그 고집과 무심함이 심했습니다.

​4. 시대를 버텨온 모든 어머니께 건네는 위로

​돌이켜보면 그 시절 대부분의 여성이 비슷한 무게를 견디며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들 그렇게 살았다"는 말이 제 상처를 지워주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 모진 시간을 묵묵히 버텨냈고, 그 독한 인내가 지금의 저를 만든 밑거름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35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나처럼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아픔을 숨기고 있을 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당신의 고통은 당연한 것이 아니며, 당신은 그 무엇보다 먼저 보호받아야 할 소중한 사람이라고요. 
저는 이제 블로그라는 저만의 공간에서 그 시절 삼켜야 했던 노란 쓴물의 기억들을 하나씩 쏟아내며 스스로를 치유해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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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 4일 수요일

[인생 이야기]나이 똑같은 형님, 나, 시누이... 왜 나는 그들에게 항상 '만만한 남'이었을까

[인생 이야기]나이 똑같은 형님, 나, 시누이... 왜 나는 그들에게 항상 '만만한 남'이었을까

1. 친정엄마라는 빈자리를 정성으로 채우려 했던 진심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8남매 사이에서 자란 저에게 '어머니'라는 존재는 평생을 따라다니는 아련한 그리움이었습니다. 
결혼 후 만난 시어머니를 보며 저는 다짐했습니다. '내 친정엄마처럼 모시자, 내가 정성을 다하면 이분도 나를 딸처럼 아껴주시겠지'라고요. 
8남매 틈바구니에서 몸에 밴 인내와 배려를 시댁에서도 고스란히 발휘하며, 저는 누구보다 착한 며느리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수한 정성은 저의 가장 큰 약점이 되어 돌아왔고, 저를 향한 부당한 대우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2. 도시 깍쟁이 형님과 시골 출신 둘째 며느리

​저희 시댁에는 참 보기 드문 인연이 있었습니다. 맏며느리인 형님과 나, 그리고 손아래 시누이까지 세 명의 나이가 똑같았던 것입니다. 동갑내기 세 여자가 한 집에 모였으니 남들은 친구처럼 지낼 법도 하다고 했지만, 시어머니의 잣대는 냉정했습니다.
​형님은 세련된 도시 여자였습니다. 
은근히 깍쟁이 기질이 있어 자기 실속을 똑 부러지게 챙겼고, 장남인 아주버님 또한 기세가 당당해 시어머니조차 형님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늘 눈치를 보셨습니다.
 반면 시골 출신인 저는 시어머니 눈에 그저 만만하고 부리기 좋은 둘째 며느리일 뿐이었습니다. 도시 깍쟁이 형님은 어려워서 대접해주고, 시골 출신인 저에게는 마음 놓고 감정을 쏟아내는 차별이 일상이었습니다.

​3. 그 시절 어느 집이나 비슷했던 '끼인 둘째'의 비애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시댁만 그랬던 건 아닐 겁니다.
 그 시절 어느 집이든 장남은 집안의 기둥 대접을 받았고, 막내는 그저 늦둥이라 깨물면 아픈 손가락처럼 귀함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그 사이에 낀 둘째였습니다. 
딸 하나에 아들 셋인 집안에서 둘째 아들과 결혼한 저는, 시어머니에게 가장 '편한' 존재이자 화풀이 대상이었습니다.
​남편 또한 결혼하자마자 지극한 효자가 되어 저에게 매일 시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하라고 강요하며 본인의 효도를 며느리인 저에게 떠넘겼습니다. 
60만 원 삭월세에서 시작해 장사 밑천을 모으느라 손등이 터져가며 일하던 시절, 남편은 제 고생보다 자기 엄마와 동생의 기분을 딸보다 더 조근조근 맞춰주는 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아들이 내 편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시어머니의 의기양양함은 대단했습니다.
그시절  시어머니들이 다 그랬을까요?

4. 아직 아이도 없던 시절, 왜 나는 도망치지 못했을까

​참 바보 같았습니다.
 아직 아이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왜 그 부당한 대우를 다 견디며 살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만약 그때 제가 지금처럼 세상을 알았거나 조금 더 영악했더라면, 그 모진 시집살이를 시작도 안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엄마 없는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가정을 지키고 싶었고, 그 착한 마음이 결국 저를 '무시해도 되는 남'으로 만들었습니다.
​친정엄마가 계셨더라면 "너 왜 그러고 사느냐"며 제 손을 잡아 끌어주셨을까요?
시어머니께 다했던 그 무수한 진심이 서러움으로 돌아왔을 때의 허망함은 35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한구석에 시린 흉터로 남아있습니다. 
이제는 그 서러웠던 시절의 저를 안아주며, 제 인생의 주인으로서 이 아픈 기록들을 하나씩 남겨보려 합니다.

2026년 2월 3일 화요일

[인생 이야기]60만 원 삭월세에서 이룬 자수성가, 그리고 시어머니와의 갈등을 통해 배운 삶의 당당함

[인생 이야기]60만 원 삭월세에서 이룬 자수성가, 그리고 시어머니와의 갈등을 통해 배운 삶의 당당함

1. 20대 후반, 가난했지만 뜨거웠던 시작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자란 저에게 '가정'은 늘 지키고 싶은 소중한 꿈이었습니다. 
결혼생활의 시작은 60만 원 삭월세 단칸방이었지만, 저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좁은 방은 제가 더 큰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죠. 15년의 홈패션 경력과 이후 20년의 식당 운영을 가능케 했던 저의 억척스러운 근성은 바로 이 삭월세 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2. 1년 만에 달성한 전셋집 장만과 예기치 못한 갈등

​잠을 줄이고 먹고 싶은 것을 아껴가며 오로지 '내 집, 내 가게'를 목표로 달린 지 딱 1년. 드디어 2,000만 원이라는 전세금을 모아 가게가 딸린 새집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기쁨도 잠시, 이삿날 찾아오신 시어머니는 축하 대신 비수를 꽂으셨습니다.
 "혼수를 제대로 해오지 않아 집안이 초라하다"는 트집이었습니다.

​3. 부당한 대우에 던진 당당한 한마디: "혼수 대신 선택한 장사 밑천"

​평소 기가 센 시어머니 밑에서 남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참아왔던 저였지만, 그날만큼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제 노력이 부정당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당찬 한마디가 터져 나왔습니다.
​"어머니, 그럼 어머니도 친구분들처럼 든든한 전셋집 하나 구해주셔요. 그러면 우리 아버지도 논 팔아서라도 혼수 최고로 해주실 거예요. 혼수 할 돈 아껴서 장사 밑천 삼아 1년 만에 이 집 마련한 거 모르시나요?"
​이 말 한마디에 평소 기세등등하던 시어머니도 입을 꾹 다무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말대꾸가 아니라, 제 삶에 대한 정당한 방어였죠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 얘기할수 있었는지 신기할 따름이죠. 그날처럼  다는것들도 참지않고 맞섰으면 좋았을텐데 라는 생각을  두고두고 하게됩니다.

​4. 시집살이의 눈물을 버티게 한 것은 결국 '엄마'라는 이름

​지금 돌아보면 20대 후반의 저는 참으로 여리고 순수했습니다. 
만약 그때 제가 지금처럼 영악했거나 나만을 생각했다면, 아이가 생기기 전 부당한 대우를 견디지 못하고 다른 길을 선택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가정을 지키고 싶었고, 제 꿈을 꺾이게 하고싶지 않았읍니다.

​5. 인생의 고난을 대하는 자세

​그 후로도 시어머니와의 갈등은 계속되었고 저는 수차례 울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진 시간들은 저를 더 단단하게 단련시켰습니다. 
부당한 상황에서도 내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진심을 다해 노력하면 반드시 결과로 보상받는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35년 자영업 인생의 기초는 화려한 혼수가 아니라, 바로 그 서러운 눈물을 닦으며 세운 '오기'와 '열정'이었습니다.

다음편에는  결혼하고 갑자기 효자노릇하는  아들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인생 이야기] 전셋집 대신 장사 밑천을 택한 60만원 삵월세의 결단

[인생 이야기] 전셋집 대신 장사 밑천을 택한 60만원 삵월세의 결단

1. 2,000만 원 전셋집 대신 택한 60만 원 삯월세의 삶

​35년 전, 우리 부부가 처음 손을 잡고 인생이라는 망망대해로 나설 때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였습니다. 
남들처럼 번듯한 전셋집에서 신혼을 시작하느냐, 아니면 당장의 안락함을 포기하고 미래를 위한 종잣돈을 만드느냐였습니다. 제가 살던 지방에서도 당시 괜찮은 전셋집을 구하려면 2,000만 원에서 3,000만 원 정도는 있어야 했습니다. 8남매 중 일곱째로 자라며 일찍이 세상 물정을 깨우쳤던 저에게 그 큰 전세금은 감당하기 버거운 현실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우리가 가진 전 재산을 주거비로 묶어두는 것이 못내 아깝게 느껴졌습니다.
​결국 우리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우리만의 방식을 택했습니다. 
보증금 없이 10달치 방세를 미리 내는 '60만 원 삯월세' 단칸방이 우리의 첫 보금자리였습니다. 
문을 열면 바로 코앞이 부엌이고,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차는 초라한 방이었지만, 그 선택 덕분에 우리는 전세금으로 들어갈 뻔한 소중한 자금을 고스란히 장사 밑천으로 돌릴 수 있었습니다.

​2. 혼수도 생략하고 살림살이도 최소화한 '현실 신혼'

​삯월세 단칸방에 들어가면서 화려한 혼수는 사치였습니다. 
방 하나에 부엌 하나가 전부인 그 좁은 공간에 남들 다 하는 커다란 장롱이나 화장대를 들일 자리는 애초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필요한 최소한의 살림살이만 갖추고 들어갔습니다. 
이불 몇 채와 냄비 몇 개가 우리 살림의 전부였지요. 
혼수 대신 우리가 선택한 것은 시장 골목 한구석의 조그만 '홈패션 가게'였습니다.
​남들은 신혼 가구 보러 다닐 때, 저는 시장 바닥에서 미싱을 돌리고 원단을 끊어왔습니다. 
비록 남들 보기에 시작은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살림이었지만, 저는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좁은 방에서 아침마다 가게로 나설 때의 그 설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60만 원 삯월세방은 잠만 자는 곳이었고, 저의 진짜 인생은 시장 골목 미싱 앞에서의 치열한 삶 속에 있었습니다.

​3. "노력하면 안 될 게 없다"는 패기로 일궈낸 세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의 저에게는 정말 대단한 '패기'가 있었습니다. 
누구의 도움 없이 맨손으로 시작했기에 두려울 것도 없었습니다. 
"젊으니까 몸으로 때우면 된다", "열심히 노력하면 세상에 안 될 게 없다"는 무모하리만큼 뜨거운 믿음이 저를 지탱해주었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가더라도 우리만의 힘으로 일어서겠다는 그 고집이 있었기에, 3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자영업의 풍파를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결혼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과 집을 합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미래를 설계하고 고난을 이겨낼 동지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2,000만 원 전셋집이 주는 안락함보다 60만 원 삯월세가 주는 절박함이 저를 더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많은 분, 특히 새로운 시작을 앞둔 젊은 세대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시작의 모습이 조금 초라하다고 해서 결코 인생까지 초라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결핍과 패기가 당신을 가장 강력한 성공의 길로 안내할 것입니다.

2026년 2월 2일 월요일

[인생 이야기 ]7살 소녀의 결핍과 헛간 소동이 바꾼 운명

[인생 이야기 ]7살 소녀의 결핍과 헛간 소동이 바꾼 운명

1. 동병상련의 인연, 그러나 너무나 달랐던 환경

저와 남편은 참 기구한 인연으로 만났습니다. 
저도 7살에 엄마를 잃었고, 남편 역시 7살에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똑같은 상처를 안고 만났기에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줄 알았지만, 살아온 환경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저는 8남매 중 일곱째로 자라며 "엄마 없는 자식 소리 듣지 마라"는 말을 뼈에 새기고 누구보다 예의를 지키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처음 마주한 남편의 집안은 무질서하고 예의가 부족한 모습이었습니다.

​2. 결혼을 앞두고 내린 단호한 결단

결혼 전 인사차 방문한 시댁에서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평생 소중히 여겨온 '도리'와 '예절'이 보이지 않는 분위기에 마음이 상했습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남편에게 솔직한 심경을 전했습니다. 
"나를 환영하지 않는 것 같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도저히 결혼할 수 없다"며 인연을 정리하자고 했습니다. 
굳이 그런 환경에 들어가 저 자신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헛간 소동과 예기치 못한 선택

하지만 며칠 뒤, 남편은 저를 다시 본가로 데려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습니다. 
결혼을 반대한다면 헛간에 불을 지르겠다며 소동을 피운 것입니다. 
평생 조심스럽게 살아온 저에게 그런 돌발 행동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때는 그 불같은 모습이 저를 향한 지독한 사랑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놀란 마음에 남편을 말리고 수습하다 보니, 결국 어찌어찌 결혼이라는 문턱을 넘게 되었습니다.

​4. 35년 세월이 준 뼈저린 깨달음

살아보니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지독한 성질머리였습니다. 
사람 고쳐 쓰는 것 아니라는 옛말을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성미를 받아내며 15년은 침구 장사를, 20년은 식당을 하며 제 몸 아끼지 않고 억척스럽게 살아야 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그 성질머리를 사랑으로 착각하고 간파하지 못한 제 자신이 참으로 미련했습니다.

​5. 인생의 갈림길에 선 이들에게 전하는 조언

혹시라도 저처럼 "나 아니면 이 사람 어쩌나" 하는 동정심이나 오기로 고민하는 분이 있다면, 저는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아니다 싶은 인연은 그 자리에서 엎는 것이 맞습니다. 
바보같이 그것을 몰라서 고생했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지만, 저의 이 쓰라린 기록이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이정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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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이야기]시어머니의 위대한 헌신, 그러나 남겨진 '가정교육'의 뼈아픈 빈자리

[인생 이야기]시어머니의 위대한 헌신, 그러나 남겨진 '가정교육'의 뼈아픈 빈자리

1. 7살에 멈춰버린 우리 부부의 유년기

​참 기구한 인연입니다.
 저도 7살에 엄마를 잃었고, 제 남편도 7살에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똑같이 부모 한쪽을 잃은 결핍을 안고 만났지만, 그 상처를 대하는 집안의 태도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저는 8남매 중 일곱째로 자라며 "엄마 없는 자식 소리 듣지 마라"는 말을 뼈에 새기며 살았습니다. 
남들보다 더 깍듯하게 인사하고, 더 부지런히 움직이며 제 자존심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집안은 그 비극을 거친 무질서로 채워나갔습니다.

​2. 재가도 하지 않고 4남매를 거둔 시어머니의 위대함

​사실 며느리인 제가 봐도 제 시어머니는 참으로 대단하고 위대한 분이십니다. 
7살 어린 아들을 포함해 4남매를 두고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젊은 나이의 시어머니는 재가도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식들을 위해 인생을 바치셨습니다. 
시장통 생활전선에서 거친 풍파를 온몸으로 맞으며 그 어린것들을 굶기지 않고 다 키워내신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숭고한 헌신입니다. 
그 억척스러운 세월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 남편도 없었겠지요.

​3. 헌신 속에 놓쳐버린 '예의'라는 가장 큰 유산

​하지만 저는 지금도 자꾸만 되묻게 됩니다. 그토록 자식들을 사랑하셨다면, 왜 그들을 더 엄하게 가르치지 못하셨을까요. 
자식들을 굶기지 않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 노릇'을 가르치는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시어머니가 밖에서 장사하며 고생하시는 동안, 4남매는 집안에서 예절도 도리도 배우지 못한 채 방치되었습니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시어머니는 그럴수록 자식들의 예의를 더 매섭게 잡아주셨어야 했습니다.

​4. 살아남은 자가 느끼는 지독한 예의의 부재

​남편과 그 형제들은 부모의 보살핌 대신 각자 알아서 살아남는 법만 배웠습니다. 
그 결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말 한마디의 무게를 전혀 모르는 어른들로 자라버렸습니다.
 제가 35년 장사 인생을 살며 가장 힘들었던 건 손님들의 갑질이 아니었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선을 넘고 무례하게 구는 시댁 식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부모가 없어서 그렇다는 핑계를 대지만, 저 역시 엄마 없이 자랐기에 그 말이 얼마나 비겁한 변명인지 너무나 잘 압니다.

​5. 35년, 이 척박한 환경에서 내가 살아남은 이유

​결혼과 동시에 시작된 장사, 그리고 그보다 더 고달팠던 예의 없는 집안에서의 생활. 저는 지금도 말합니다. 
"나는 이 집안에서 살아남았다"고요. 
시어머니의 헌신은 고맙고 위대하지만, 그로 인해 면죄부를 받은 남편 식구들의 무례함은 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었습니다. 
저는 제 아이들에게만큼은 절대로 이 굴레를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35년 세월 동안 제 자존심을 지켜왔습니다. 
이제 이 굴곡진 기록을 통해, 7살에 엄마 여읜 소녀가 어떻게 그 척박한 곳에서 반듯한 나무로 살아남았는지 하나씩 풀어내려 합니다.

​"제가 이 모진 세월을 하나하나 기록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저처럼 엄마 없는 서러움을 장사로 달래며, 예의 없는 환경 속에서 억울하게 자신을 깎아 먹으며 사는 사람이 더는 없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제 못난 인생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넘어지지 않는 지팡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서른아홉 늦둥이의 온기, 그리고 한 달 만에 마주한 차가운 현실

 막둥이를 낳고 이번만큼은 제대로 된 휴식을 꿈꿨습니다. 서른아홉이라는 늦은 나이에 찾아온 귀한 생명이었기에, 앞선 두 딸을 낳고 몸조리도 못한 채 일터로 달려가야 했던 그 서러운 세월을 보상받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야속하게도 이전과 똑같이 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