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4일 화요일

인생이야기: 입덧 속에 치러진 상가 계약, 35년 전 그날의 서글픈 풍경

 

인생이야기: 입덧 속에 치러진 상가 계약, 35년 전 그날의 서글픈 풍경

첫째 때부터 이어진 장사, 그리고 입덧과 함께 찾아온 둘째

저는 첫째 아이를 키울 때부터 이미 장사 전선에 뛰어들어 쉼 없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홈패션 가게를 꾸려가며 8남매 일곱째 특유의 성실함으로 버텼지만, 새 아파트로 이사할 무렵 둘째가 생겼을 때는 몸이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저는 유독 입덧이 심한 체질이라 물 한 모금 넘기기 힘들었고, 이사까지 겹치니 만사가 귀찮아 그저 이번만큼은 조금 쉬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첫째를 키우며 장사하느라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제게, 둘째 임신은 잠시 쉬어갈 핑계가 되어주길 바랐던 것입니다.

아내의 고통보다 앞섰던 남편의 독단적인 상가 계약

하지만 남편은 제 몸 상태나 마음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입덧으로 기운을 못 차리고 있을 때, 남편은 저와 상의 한마디 없이 혼자서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아파트 상가를 혼자 돌아다니더니, 제가 장사를 계속할 수 있는 형편인지 묻지도 않고 덜컥 상가 가게를 계약하고 온 것입니다. 이미 장사로 뼈가 굵어가는 아내가 입덧으로 힘들어하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남편은 '돈 벌어야 한다'는 자기 욕심과 판단만으로 제 앞날을 멋대로 결정해버렸습니다.

상가 주인도 몰랐던 와이프의 존재와 서글픈 소외

더 기가 막힌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계약 당시 상가 주인은 제 존재 자체를 전혀 몰랐다고 하더군요. 남편이 혼자 와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처리하니, 당연히 남편이 직접 운영할 가게인 줄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곳에서 몸을 부딪치며 재봉틀을 돌리고 손님을 맞이해야 할 사람은 저였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계약의 주체에서도, 결정의 과정에서도 철저히 배제된 '투명 인간'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제 의사가 무시당했다는 사실이 가슴에 깊은 멍으로 남았습니다.

'생활비'로 증발한 나의 피땀, '저축'으로 쌓인 남편의 자산

그렇게 등 떠밀리듯 시작된 장사에서 남편은 교묘한 경제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네가 버는 돈은 생활비로 쓰고, 내 돈은 저축하자"는 규칙이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처럼 각자 관리하는 합리적인 관념은커녕, 제가 번 돈은 가족의 끼니와 생활비라는 명목 아래 흔적 없이 사라지는 소모품이 되었습니다. 15년 홈패션과 20년 식당, 도합 35년 동안 제가 흘린 땀은 생활비라는 늪에 빠져 증발했고, 남편의 수익은 고스란히 그의 자산으로만 쌓였습니다. 생활비를 우습게 여기는 남편의 태도 속에 제 노동의 가치는 늘 당연한 희생으로 치부되었습니다.

35년의 후회를 기록하며, 요즘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살면 잘 살 줄 알았다"는 제 믿음이 너무나 후회스럽습니다. 입덧으로 힘든 아내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계약을 진행했을 때, 왜 저는 요즘 사람들처럼 "내 돈은 내 돈, 네 돈은 네 돈"이라며 당당하게 제 몫을 주장하지 못했을까요. 제가 굳이 이 아픈 기록을 https://www.google.com/search?q=lucky-seven-life.com에 남기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요즘 젊은 분들은 저처럼 '바보같이' 참는 것이 미덕이라 여기지 말고, 처음부터 현명하게 자기 삶과 경제권을 지키며 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 뼈아픈 기록이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현명하게 꾸려가는 작은 길잡이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2026년 2월 23일 월요일

[인생이야기] 내 아이 다섯 살, 꿈에 그리던 최고급 아파트 입주하던 날

 [인생이야기] 내 아이 다섯 살, 꿈에 그리던 최고급 아파트 입주하던 날

1. 셋방살이 3년의 설움을 씻어준 합격 통지서 단칸방 셋방살이로 시작했던 신혼 시절, 제 소원은 오직 내 아이에게 번듯한 방 하나를 만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를 업고 밤낮없이 일하며 십 원 한 장 아껴가며 살았던 그 고단했던 시간들이 모여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큰애를 낳고 딱 3년 만에 청약 당첨 소식을 들었을 때, 그 기쁨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내 집이 생긴다는 안도감과 내 아이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줄 수 있다는 자부심에 그동안의 고생이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습니다.

2. 다섯 살 아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던 첫 입주의 기억 큰아이가 딱 다섯 살 되던 해, 당시 동네에서 가장 좋다고 소문난 최고급 25평 아파트에 마침내 입주했습니다. 새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던 날, 반짝이는 거실 바닥을 맨발로 뛰어다니며 좋아하던 아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엄마, 여기가 우리 집이야?"라고 묻던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며, 저는 다시 한번 다짐했습니다. 이 소중한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힘든 일도 기꺼이 이겨내겠노라고 말입니다.

3. 최고급 아파트가 내게 가르쳐준 성취의 가치 당시 그 아파트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젊은 엄마가 무슨 돈으로 그런 고급 아파트에 들어갔느냐는 시샘 섞인 말들도 있었지만, 저는 당당했습니다. 남들 잠잘 때 덜 자고, 남들 쓸 때 덜 쓰며 정직하게 일궈낸 땀방울의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최고급 아파트 입주는 저에게 단순히 비싼 집을 가질 수 있다는 만족감을 넘어, '간절히 원하고 노력하면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인생의 가장 큰 교훈을 심어준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4. 동네 아줌마들의 "돈 모을 골든타임"을 실감하다 제가 집 살 돈을 모으기 위해 악착같이 살 때, 동네 아줌마들은 늘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새댁, 애들 어릴 때 부지런히 모아야 해. 애들 크면 돈 모으기 정말 힘들어." 아파트에 입주하고 아이를 키워보니 그 말이 얼마나 무서운 진리였는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되기 전까지가 인생에서 가장 돈을 모으기 좋은 시기였고, 그때 그 조언을 새겨듣고 억척스럽게 움직였기에 그 좋은 집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선배 엄마들의 지혜가 제 인생의 든든한 방어막이 되어주었습니다.

5. 그날의 성공 기억으로 다시 서는 62세의 오늘 세월이 흘러 지금은 또 다른 인생의 고개를 넘고 있지만, 큰애 다섯 살 때 최고급 아파트를 내 손으로 일궈냈던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저를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 "한 번 해본 사람은 다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저는 오늘도 제 인생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정성껏 가꿔나갑니다. 저의 이 담백하고 치열했던 내 집 마련 기록이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집 마련을 위해 애쓰는 많은 이들에게 실질적인 자극과 희망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026년 2월 22일 일요일

인생이야기 [62세 장사꾼 엄마의 새로운 도전, 구글 애드센스 승인을 기다리며]

 인생이야기 [62세 장사꾼 엄마의 새로운 도전, 구글 애드센스 승인을 기다리며]

1. 35년 장사 인생 끝에 마주한 '구글 애드센스'라는 문턱 홈패션 15년, 요식업 20년까지 도합 35년을 자영업자로 살면서 참 많은 손님을 치렀습니다. 이제는 은퇴하고 쉴 나이라지만, 저는 아들의 당뇨 관리 기록을 남기고 제 인생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블로그라는 새로운 가게를 차렸습니다. 그 가게의 정식 간판이라 할 수 있는 '구글 애드센스' 승인을 받기 위해 요즘 저는 난생처음 보는 용어들과 씨름 중입니다. 장사할 때 가게 문을 열려면 구청에 신고하고 허가를 받아야 하듯, 제 블로그도 구글이라는 큰 시장에서 정식으로 인정받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해나가고 있습니다.

2. 한 번의 거절, 35년 뚝심으로 다시 도전하는 이유 사실 얼마 전 첫 번째 승인 요청에서 거절이라는 쓴맛을 보았습니다. 35년 장사하며 숱한 풍파를 겪었어도, 막상 "승인 취소"라는 통보를 받으니 마음이 영 개운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장사도 처음 문 열었을 때 바로 대박이 나지 않듯, 블로그도 제 정성이 쌓여야 비로소 문이 열린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타 하나 없이 글을 다듬고, 큰애 다섯 살 때 최고급 아파트에 입성했던 그 시절의 열정을 되살려 다시 한번 구글의 문을 두드려 봅니다.

3. 애드센스 공부하며 깨달은 '정직한 콘텐츠'의 힘 승인을 준비하며 여러 정보를 찾아보니, 결국 구글이 원하는 것은 '진짜 자기 이야기'였습니다. 남의 글을 베껴 쓰는 것이 아니라, 제가 직접 겪은 아들의 당뇨 관리나 25평 아파트 마련의 지혜 같은 생생한 경험 말입니다. 이것은 20년 식당을 하며 조미료 대신 천연 재료로 맛을 내야 단골이 생기는 것과 똑같은 이치였습니다. 제가 살아온 62년의 세월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구글 애드센스라는 승인 과정을 통해 세상에 증명해 보이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4. 62세 청춘에게 블로그는 인생의 새로운 보금자리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는 것이 때로는 재봉틀 돌리는 것보다 어깨가 아프고 눈이 침침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 읽히고,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렙니다. 애드센스 승인을 기다리는 이 시간은 마치 식당 개업 전날, 깨끗하게 닦인 식탁을 보며 손님을 기다리는 마음과 같습니다. 단순히 광고 수익을 얻는 것보다, 제가 정성껏 차린 이 '글방'이 구글이라는 큰 무대에서 정식으로 합격점을 받는 그 짜릿한 성취감을 맛보고 싶습니다.

5. 멈추지 않는 도전, 마침내 열릴 승인의 문 큰애가 다섯 살 때 동네에서 가장 좋은 아파트에 입주하며 느꼈던 그 기쁨을, 이제는 애드센스 승인이라는 소식으로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습니다. 35년 자영업의 파고를 넘고 신용회복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온 저에게 이 도전은 '아직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원천입니다. 이번에 다시 검토 요청을 누르며, 저는 확신합니다. 진심은 통하게 마련이고, 62세 엄마의 정직한 기록은 반드시 구글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늘도 저는 설레는 마음으로 승인의 문이 활짝 열리기를 기다립니다.

인생이야기 [큰애 다섯 살, 최고급 25평 아파트 입주로 증명한 돈 모으기의 적기]

 인생이야기 [큰애 다섯 살, 최고급 25평 아파트 입주로 증명한 돈 모으기의 적기]

1. 셋방살이 3년의 끝, 큰애 다섯 살에 이룬 내 집 마련 단칸방 셋방살이로 시작했던 고달픈 신혼 시절, 제 머릿속에는 오직 '내 집 한 칸'이라는 목표뿐이었습니다. 아이를 업고 밤낮없이 일하며 십 원 한 장 아껴가며 살았던 시간들이 모여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큰애를 낳고 딱 3년 만에 청약의 기회가 왔고, 드디어 아이가 다섯 살 되던 해에 당시 동네에서 가장 고급스럽기로 소문난 25평 아파트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새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던 날, 다섯 살 아들이 거실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며 느꼈던 그 벅찬 감동은 제 평생 가장 자부심 넘치는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2. 동네 아줌마들의 금언, "애들 어릴 때가 돈 모을 골든타임" 제가 집 살 돈을 모으기 위해 악착같이 살 때, 시장통 동네 아줌마들은 늘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새댁, 애들 어릴 때 부지런히 모아야 해. 애들 크면 돈 모으기 정말 힘들어." 그때는 그 말이 그저 흔한 잔소리인 줄 알았는데, 막상 최고급 아파트에 입주하고 아이를 키워보니 그 말이 얼마나 무서운 인생의 진리였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되기 전까지가 부모로서 목돈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골든타임'이었고, 저는 다행히 그 시기를 놓치지 않고 내 집 마련에 쏟아부었습니다.

3. 최고급 아파트가 가르쳐준 성취감과 자산의 가치 당시 입주했던 아파트는 지역에서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젊은 엄마가 무슨 수로 그런 최고급 아파트에 들어갔느냐며 시샘 어린 시선도 받았지만, 저는 당당했습니다. 남들 잠잘 때 일하고 남들 쓸 때 아끼며 정직하게 일궈낸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그 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저에게 '하면 된다'는 강력한 성취감을 심어주었습니다. 최고급 아파트라는 환경은 저를 더 부지런하게 만들었고, 내 자산을 지키고 키워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소 체험하게 해준 인생의 스승이었습니다.

4. 아이의 성장과 함께 뼈저리게 실감한 옛말의 무서움 실제로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고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하면서 들어가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학원비부터 생활비까지 지출 단위가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 것을 보며, "애들 크면 돈 못 모은다"던 아줌마들의 말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음을 실감했습니다. 만약 제가 아이 다섯 살 때 그 최고급 아파트를 미리 장만해두지 않았더라면, 아마 늘어나는 교육비와 지출을 감당하며 집까지 마련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선배 엄마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가 제 인생의 가장 튼튼한 경제적 방어막이 되어주었던 셈입니다.

5. 62세의 오늘, 그때의 성공 기억으로 다시 서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또 다른 인생의 고개를 넘고 있지만, 큰애 다섯 살 때 최고급 아파트를 내 손으로 일궈냈던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저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입니다. "가장 힘들 때 가장 큰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배웠기에, 저는 지금의 시련 앞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저의 이 담백하고 치열했던 내 집 마련 기록이 구글 애드센스 승인을 넘어, 지금 이 순간 아이를 키우며 미래를 설계하는 많은 젊은 부모들에게 "지금이 바로 기회"라는 강력한 자극과 희망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인생이야기]첫 아이를 안았던 기쁨, 그리고 시어머니의 비교 속에 얼룩진 산후조리

인생이야기 첫 아이를 안았던 기쁨, 그리고 시어머니의 비교 속에 얼룩진 산후조리

​인생을 살아가며 가장 벅차오르는 순간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첫아이를 품에 안았던 그날을 말하곤 합니다. 열 달이라는 긴 기다림 끝에 마침내 마주한 아이의 모습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핏덩이 같은 아이의 작은 손가락이 제 검지를 꼭 쥐었을 때, 저는 비로소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고 진짜 '엄마'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에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올랐습니다. 생명의 신비로움과 부모가 되었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교차하며, 세상 모든 풍경이 이전과는 다르게 아름답고 찬란해 보이던 축복 같은 찰나였습니다.

​하지만 그 벅찬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마주한 현실은 차갑고 높기만 했습니다. 산모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친정엄마의 따뜻한 손길이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시어머니께서 산바라지를 위해 오시게 되었습니다. 만약 친정엄마가 곁에 계셨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너는 꼼짝도 하지 말고 누워만 있어라" 하시며 미역국부터 아기 기저귀 가는 일까지 손수 다 챙겨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후조리를 해주러 오셨다던 시어머니는 오히려 며느리에게 대접받기를 원하셨습니다. 몸조리에 집중해야 할 산모가 오히려 어른의 눈치를 보며 수발을 들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으니, 육체적인 고단함보다 마음의 허기가 먼저 찾아왔던 참으로 서글프고 고된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시어머니는 산바라지를 해주시는 기간 내내 저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변 사례와 비교하며 사사건건 훈수를 두셨습니다. 당시 시댁에는 저와 상황이 비슷한 다른 가족들이 이미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었습니다. 아기 목욕을 시키는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시어머니는 뒤에서 "누구는 손놀림이 얼마나 야무진지 모른다, 너는 왜 그리 서투냐"며 혀를 차셨고, 아이에게 젖을 물릴 때면 "누구는 젖이 잘 나와서 애가 통통하게 살이 오르던데 너는 애를 왜 저렇게 울리냐"며 저의 부족함을 타박하셨습니다. 모든 일상에 사사건건 비교가 따라붙으니 나중에는 아이를 돌보는 일조차 겁이 났고, 시어머니가 입만 열리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정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어른들은 왜 그리도 산모의 여린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고 야속하게만 구셨는지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첫아이를 낳고 병원에 입원시켰다가 겨우 퇴원시켜 온 초보 엄마의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보듬어주기는커녕, 며느리를 부리듯 대접만 받으려 하셨던 그 모습이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습니다. 젖몸살로 가슴이 돌덩이처럼 굳어 열이 펄펄 끓어오르는 와중에도, 시어머니의 매서운 눈총이 무서워 신음소리 한 번 크게 내지 못하고 홀로 눈물을 삼켰던 그 삼칠일의 기억은 저에게 따뜻한 몸조리가 아니라 지독하게 서러운 기억으로 박제되었습니다. 산모에게 가장 절실했던 정서적 안정이 끊임없는 비교와 질책 속에 무참히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렇게 서러움을 견디며 시작된 엄마로서의 삶은 어느덧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저를 단단한 자영업자로 성장시켰습니다. 그때 시어머니가 던진 모진 비교의 말들과 대접받으려던 태도는 역설적이게도 저를 이 거친 세상에서 홀로 살아남게 한 독한 의지가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내 힘으로 당당하게 성공해서 보여주리라' 다짐하며 험난한 세월을 버텨온 강력한 원동력이 바로 그 산방에서의 눈물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62세라는 나이에 도달하여 지난날을 회상해보니, 그 모진 시간들이 결국 지금의 저를 만든 밑거름이 되었음을 느낍니다. 이제야 그 시절 숨죽여 울며 견뎌냈던 젊은 날의 나 자신에게 진심 어린 위로와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참 장하다, 너 정말 멋지게 잘 해냈다!"라고 말입니다.

2026년 2월 21일 토요일

[인생이야기]시누이의 비겁한 협박을 뚫고 받아낸 2,022만 원, 가짜 사과를 진짜 결과로 되받아치다

 

인생이야기: 시누이의 비겁한 협박을 뚫고 받아낸 2,022만 원, 가짜 사과를 진짜 결과로 되받아치다

1. 믿었던 가족 설계사의 배신, "환급금 0원"이라는 청천벽력

35년 자영업 인생을 살며 수많은 사람을 겪었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이 이토록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돌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설계사로 일하던 시누이를 믿고 제 보험과 딸아이 보험까지 5년 동안 단 한 번의 연체 없이 성실하게 납부해 왔습니다. 하지만 사정이 생겨 정리를 하려 하니, 시누이는 "해약환급금이 단 1원도 없는 상품이다"라며 오히려 저를 무식하다고 몰아세웠습니다. 5년의 성실함이 부정당하는 순간, 돌아온 것은 미안함이 아닌 날 선 막말이었습니다. 가족이라 믿고 맡겼던 제 신뢰가 산산조각이 났고, 저는 이 부당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불완전 판매'**를 근거로 정당한 민원을 제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2. 비겁한 협박의 시작, "내 비밀을 폭로하겠다고?"

제가 물러서지 않고 민원을 언급하며 강력히 항의하자, 시누이는 본인의 남편까지 합세해 상상조차 못 할 비겁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35년 장사를 하며 남편 모르게 짊어져 온 제 개인적인 채무 사실을 빌미로, **"민원을 취하하지 않으면 남편에게 네 빚 이야기를 다 폭로하겠다"**며 협박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가족들을 대동하고 제가 운영하는 가게로 들이닥쳐 손님들 앞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함을 지르며 저를 압박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 제 약점을 쥐고 흔들며 제 입을 막으려 했던 그 순간, 저는 평생 느껴보지 못한 깊은 환멸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3. 공동협박에 대한 강력한 법적 대응, "경찰 고발"로 맞서다

그들은 제가 비밀이 탄로 날까 봐 겁먹고 물러날 줄 알았겠지만, 저는 더 이상 숨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단호하게 경고했습니다. 개인의 비밀을 빌미로 금전적 포기를 강요하는 행위는 엄연한 **'협박죄'**이며, 특히 두 사람이 합심하여 위력을 행사하는 것은 '공동협박'으로 간주되어 가중처벌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고지했습니다. "내 빚이 폭로되는 게 무서워서 권리를 포기하지 않겠다. 협박하는 것도 죄고 폭로하는 것도 명예훼손이니, 한 번만 더 행패를 부리면 바로 경찰에 고발하겠다"는 제 강경한 태도에 시누이 부부의 오만함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본인들의 범죄 행위가 설계사 자격 박탈을 넘어 형사 처벌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공포가 그들을 짓눌렀을 것입니다.

4. 맘에 없는 사과와 2,022만 원 전액 환급이라는 최종 승리

제 단호한 정면 돌파에 당황한 그들은 결국 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태도를 바꿨습니다. 민원이 정식으로 접수되어 조사가 시작되자, 시누이는 돈을 돌려받기 직전 갑자기 제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해왔습니다. 비록 상황을 모면하려는 '가짜 사과'인 줄은 알았지만, 35년 만에 처음으로 그 무소불위 같던 시누이가 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제 보험 500만 원과 딸 보험 1,522만 원을 더해 총 2,022만 원을 단 1원의 손실 없이 전액 환급받았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나를 만만하게 보고 약점을 흔들려던 사람들에게 법과 원칙으로 승리했다는 자부심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였습니다.

5. 맺으며: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합니다

저처럼 약점이 잡힐까 봐, 혹은 가족 간의 불화가 커질까 봐 부당함을 참고 계신 분들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상대가 내 약점을 무기로 삼는 순간, 그들은 이미 가족이 아닙니다. 저는 이번 사건을 통해 2,022만 원이라는 거금보다 더 소중한 '당당함'을 얻었습니다. 35년 자영업자가 얻은 가장 큰 교훈은, 내가 용기를 내어 맞설 때 비로소 내 권리와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저는 그 지긋지긋한 협박과 막말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나, 제 인생의 진정한 주인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여러분도 비겁한 협박에 무릎 꿇지 마십시오. 정의는 결국 스스로 행동하는 사람의 편입니다.

2026년 2월 20일 금요일

인생이야기 [살림노하우] 15년 이불 장사 전문가가 공개하는 겨울 이불 세탁법과 소재별 관리 노하우

 인생이야기 [살림노하우] 15년 이불 장사 전문가가 공개하는 겨울 이불 세탁법과 소재별 관리 노하우

안녕하세요. 8남매 중 일곱째 딸로 태어나 7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새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참으로 모진 세월을 견뎌온 '인생이야기' 주인장입니다. 제 인생의 절반 이상인 35년을 자영업자로 살아오며, 15년은 이불과 홈패션 매장을 운영했고 20년은 식당을 하며 산전수전을 다 겪었습니다.

오늘은 그 치열했던 삶의 현장에서 몸소 터득한 15년 이불 장사 내공을 꾹꾹 눌러 담아, 여러분의 가족 건강과 숙면을 책임질 겨울 이불 관리법을 아주 상세히 공유해 드리고자 합니다. 이 정보는 구글에서 찾는 그 어떤 정보보다도 생생한 현장의 기록임을 자부합니다.

 1. 겨울 이불 세탁 전 반드시 확인해야 할 3가지 원칙

이불 장사를 할 때 수많은 손님을 만나면 가장 많이 하시는 실수가 "그냥 세탁기에 넣고 돌렸더니 솜이 다 죽었다"는 하소연이었습니다. 이불은 우리 피부에 가장 오래 닿고 호흡기 건강과 직결되기에 세탁 전 소재 확인이 1순위입니다.

첫째, 세탁 라벨 확인은 필수 중의 필수입니다. 이불 귀퉁이에 달린 작은 라벨을 먼저 보십시오. 물세탁이 가능한지, 아니면 반드시 드라이클리닝을 해야 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특히 최근 유행하는 고가의 기능성 소재들은 세탁기 한 번 잘못 돌렸다가 수십만 원짜리 이불을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둘째, 애벌빨래의 힘을 믿으셔야 합니다. 목 부분이나 얼굴이 자주 닿는 곳에 누렇게 찌든 때가 있다면 세탁기에 넣기 전 중성세제를 살짝 묻혀 미온수로 살살 비벼주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35년 장사 경험상, 이 작은 정성이 세탁 후 이불의 수명을 결정합니다.

셋째, 세탁기 용량을 체크하세요. 겨울 이불은 물을 머금으면 무게가 엄청나게 불어납니다. 가정용 세탁기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큰 이불을 억지로 넣으면 세탁도 안 될뿐더러 세탁기 고장의 원인이 됩니다. 이럴 때는 근처 코인세탁소의 대형 세탁기를 이용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2. 소재별 맞춤 세탁법: 전문가가 전하는 상세 가이드

이불은 겉감이 다르고 속통이 다릅니다. 소재의 특성을 알아야 이불의 보온력을 10년 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거위털(구스) 및 오리털 이불 관리 많은 분이 구스 이불을 무조건 드라이클리닝 맡기시는데, 사실 이는 잘못된 상식입니다. 드라이클리닝을 자주 하면 깃털에 있는 유지분(천연 기름기)이 빠져서 보온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중성세제를 이용한 미온수 단독 물세탁입니다. 특히 섬유유연제는 털을 뭉치게 하고 보온력을 떨어뜨리니 절대 쓰지 마시고, 세탁 코스는 가장 부드러운 '울 코스'를 선택해 주세요.

극세사 및 차렵이불 관리 극세사는 먼지가 잘 끼지 않는 장점이 있지만 사람의 피지나 땀 흡수가 매우 빠릅니다. 가루 세제를 쓰면 미세한 털 사이에 세제 찌꺼기가 남을 수 있으니 반드시 액체 세제를 권장합니다. 또한 극세사는 열에 약합니다. 빨리 말리고 싶은 마음에 고온 건조기를 돌리면 극세사 특유의 보들보들한 느낌이 사라지고 뻣뻣하게 굳어버리니 주의해야 합니다.

양모(양털) 이불 관리 양모는 가급적 세탁 횟수를 줄이는 것이 상책입니다. 자주 빨면 양모 특유의 탄력이 줄어듭니다. 가벼운 오염은 부분 세탁을 하시고, 전체 세탁 시에는 반드시 찬물에 양모 전용 세제를 사용해 짧게 세탁하셔야 수축 현상을 막을 수 있습니다.

 3. 35년 장사꾼이 알려주는 완벽한 건조와 보관 꿀팁

세탁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건조입니다. 겉은 말랐어도 속통이 눅눅하면 금방 곰팡이가 피고 불쾌한 냄새가 나기 마련입니다.

햇볕과 바람을 이용한 자연 건조 볕이 좋은 날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 사이가 골든타임입니다. 이불을 널어두고 1~2시간마다 한 번씩 막대기로 팡팡 두드려주면 죽어있던 솜의 볼륨이 다시 살아나고 먼지도 자연스럽게 털립니다. 건조기를 쓰신다면 저온으로 길게 돌리는 것이 이불의 조직을 손상시키지 않는 비결입니다.

이불의 숨구멍을 살려주는 보관법 계절이 지나 이불을 넣을 때 공간 차지를 줄이려고 압축팩을 많이 쓰시죠? 하지만 이는 솜이나 깃털의 복원력에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습니다. 되도록 통풍이 잘 되는 부직포 가방이나 면 가방에 넣으세요. 이불장에서도 아래쪽보다는 위쪽에 보관하여 다른 이불의 무게에 눌리지 않게 하는 것이 15년 이불 전문가가 드리는 마지막 팁입니다.

장사가 잘될 때도 있었고, 코로나 여파로 가게를 접어야 할 만큼 힘든 시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진 풍파 속에서도 정직하게 좋은 정보를 나누는 것만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제 글이 여러분의 따뜻한 밤에 작은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인생 이야기[출산 후기] 죽음보다 더한 젖몸살과 서러웠던 산후조리, 35년 엄마의 생생한 조언


인생 이야기[출산 후기] 죽음보다 더한 젖몸살과 서러웠던 산후조리, 35년 엄마의 생생한 조언

Gemini인생이야기 [출산 후기] 죽음보다 더한 젖몸살과 서러웠던 산후조리, 35년 엄마의 생생한 조언

안녕하세요.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 7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일찍부터 삶의 매운맛을 보며 자란 35년 차 자영업자입니다. 오늘은 제 인생에서 가장 외롭고 아팠던 순간인 '첫딸 출산'과 그 뒤에 찾아온 지옥 같은 젖몸살, 그리고 서러웠던 산후조리 경험을 통해 얻은 삶의 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40도 고열의 사투, 아기의 입원과 시작된 비극

첫 아이를 낳고 사흘 만에 아기가 원인 모를 40도 고열로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처럼 시설 좋은 조리원도 없던 시절, 갓 낳은 핏덩이를 병원에 두고 돌아온 집은 차가운 냉기만 가득했습니다. 이때 겪은 심리적 고통은 이후 제가 35년 장사를 하며 겪은 어떤 경영 위기보다도 견디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 [정보] 산후 산모의 심리적 안정의 중요성 산후 1~2주 사이의 심리적 상태는 산모의 평생 건강을 좌우합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는 유선염을 악화시키고 산후풍의 원인이 되므로, 주변 가족의 적극적인 배려와 지지가 필수적입니다.

2. 애 낳는 것보다 백배 더 아픈 '지옥의 젖몸살'

아이에게 젖을 물리지 못하자 가슴은 금방 돌덩이처럼 굳어버렸습니다. 당시 "약을 먹으며 젖을 짜지 말고 그대로 삭히라"는 잘못된 정보를 믿고 참았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가슴은 터져 나갈 듯 부풀고, 온몸은 불덩이가 되어 밤새 홀로 울부짖었습니다. 정말이지 죽음의 문턱을 오가는 고통이었습니다.

⚠️ [주의] 젖몸살(유선염) 시 절대 금기사항

  • 무작정 참기: 젖을 짜내지 않고 방치하면 고름이 생기는 유방농양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 검증되지 않은 민간요법: "그냥 삭히라"는 말은 위험합니다. 조금씩 유축하며 유선을 뚫어주는 것이 올바른 대처법입니다.

3. 이기적인 남편과 시어머니, 서러웠던 산바라지

그 고통의 밤, 옆에서 코를 골며 자는 이기적인 남편과 "내 아들 잠 설칠까 봐" 며느리 눈치를 주던 시어머니의 모습은 제 가슴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흉터를 남겼습니다. 친정엄마 없이 시댁에서 산바라지를 하며 눈물 젖은 미역국을 먹던 그 시절, 저를 살려준 건 결국 달려와 젖을 짜주며 같이 울어준 친정언니였습니다.

✅ [팁] 올바른 산후조리 환경 조성법

  • 실내 온도 조절: 무조건 땀을 내는 것보다 24~26도의 쾌적한 온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 남편의 역할: 남편은 방관자가 아닌 공동 육아와 케어의 주체가 되어야 산모의 회복 속도가 2배 이상 빨라집니다.

4. 고통을 견뎌내고 일궈온 35년의 삶

지옥 같은 젖몸살과 서러운 시집살이를 견뎌냈기에, 저는 이후 15년의 이불 장사와 20년의 식당 운영이라는 험난한 자영업의 길을 억척스럽게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통증은 제 가슴에 단단한 굳은살이 되었고, 어떤 풍파에도 무너지지 않는 '엄마'라는 이름을 완성해 주었습니다.

인생의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고통은 나누고 정보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저의 이 아픈 기록이 누군가에게는 실질적인 정보가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2026년 2월 18일 수요일

[인생 이야기] 제주도 유채꽃밭에 핀 일곱 송이 빨간 꽃, 7자매의 웃음꽃

{인생 이야기}제주도 유채꽃밭에 핀 일곱 송이 빨간 꽃, 7자매의 웃음꽃

​안녕하세요. 지난번 조카 결혼식에서 1남 7녀가 모였던 가슴 벅찬 이야기에 이어, 오늘은 우리 일곱 자매가 함께 제주도 땅을 밟으며 못다 한 수다를 떨고 온 행복한 기록을 남겨보려 합니다.
 8남매 중 오빠를 제외한 우리 일곱 자매가 제주도를 노랗게 물들인 유채꽃밭에서 보낸 시간은, 그 옛날 새엄마 밑에서 울고 웃으며 자란 우리들의 보상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유채꽃보다 더 붉게 피어난 우리 일곱 자매의 모습입니다. 드레스코드를 레드로 맞췄더니 제주도의 봄이 더 화사하게 느껴지네요.

유채꽃보다 더 붉게 피어난 우리 일곱 자매의 모습입니다. 드레스코드를 레드로 맞췄더니 제주도의 봄이 더 화사하게 느껴지네요.

​노란 유채꽃과 대비되는 '레드' 드레스코드의 마법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자매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옷을 맞춰 입는 것이었습니다. 노란 유채꽃밭에서 사진이 가장 잘 나오려면 보색인 '빨간색'이 최고라는 생각에 다들 붉은 계열로 옷을 맞춰 입고 나타났지 뭐예요.

​일곱 자매가 나란히 빨간 옷을 입고 유채꽃 사이를 걸어가니, 지나가던 분들이 "어머, 저 집은 딸들이 어쩜 저렇게 화목해?"라며 다들 쳐다보시더라고요. 
7살 어린 나이에 친엄마를 여의고 늘 주눅 들어 살던 그 시절의 우리가, 이제는 이렇게 당당하고 화사하게 웃으며 사람들의 시선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오빠의 빈자리, 하지만 마음만은 8남매 완전체

​이번 여행에는 우리 집의 든든한 기둥인 오빠가 아쉽게도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여자들끼리만 모이니 수다가 끊이지 않아 "역시 여자들이 모여야 제맛이다"라며 깔깔거렸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아휴, 우리 오빠도 이거 참 좋아하는데..." 하고 오빠 생각이 절로 나는 건 어쩔 수 없더군요.

​어릴 적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맛있는 게 생기면 우리 자매들 입에 먼저 넣어주려 애쓰던 오빠였습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었지만, 제주도의 푸른 바다를 보며 나눈 이야기 속에는 언제나 우리 오빠가 함께 있었습니다. 다음번에는 꼭 오빠까지 포함해서 우리 8남매가 다 함께 제주도 땅을 밟기로 굳게 약속했답니다.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길. 8남매로 태어나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준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길. 8남매로 태어나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준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세월의 흔적 속에서 발견한 열 살 소녀의 미소

​사실 우리 일곱 자매는 이제 다들 누군가의 할머니, 어머니가 되어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었습니다. 하지만 유채꽃밭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사진을 찍는 순간만큼은 다시 열 살 소녀로 돌아간 기분이었습니다. 새엄마 밑에서 눈치 보며 살던 서러운 기억도, 대가족의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야 했던 고단한 세월도 제주도의 바람에 다 날려 보냈습니다.

​"얘, 너는 아직도 웃을 때 코를 찡긋하는구나!", "언니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진 찍는 걸 참 좋아해." 서로의 변하지 않은 모습들을 찾아내며 웃다 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시고 우리끼리 부대끼며 자란 세월이 길어서인지, 우리는 눈빛만 봐도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압니다. 
이 깊은 우애가 바로 친엄마가 우리에게 남겨준 가장 큰 유산이겠지요.

​대가족 제주 여행을 준비하시는 분들께 드리는 팁

1• ​사진이 잘 나오는 드레스코드: 유채꽃밭처럼 색감이 강한 곳에서는 저희처럼 대비되는 색상(빨강, 파랑 등)을 선택하세요. 사진의 주인공이 확실히 돋보입니다.

2• ​배려하는 마음: 인원이 많으면 먹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네가 좋으면 나도 좋다"는 마음 하나면 여행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3• ​기록의 중요성: 자매들이 다 모이는 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귀찮더라도 사진을 많이 남기세요. 그 사진 한 장이 나중에 우리를 다시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마치며

​제주도의 봄은 따뜻했지만, 자매들과 함께한 시간은 그보다 훨씬 더 뜨거웠습니다.
 8남매라는 이름 아래 묶인 우리들의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번 깨달은 여행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곁에 있는 형제, 자매에게 오늘 "우리 조만간 얼굴 한번 보자"고 먼저 연락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가족은 우리가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뒤를 든든히 지켜주는 가장 따뜻한 보루입니다.






[인생이야기] 밤마다 집을 나섰던 어린 소녀, 몽유병의 원인과 아픈 기억

[인생이야기] 밤마다 집을 나섰던 어린 소녀, 몽유병의 원인과 아픈 기억

7살 어린 나이에 엄마를 여의고, 새엄마 밑에서 눈치 보며 살던 그 시절. 저에게는 남들에게 말 못 할 희한한 버릇이 하나 있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안방 문턱에 앉아 있기도 하고, 어떤 날은 마당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기도 했지요. 나중에서야 그것이 '몽유병'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시절엔 그저 귀신이 들렸나 싶어 무섭기만 했습니다. 오늘은 제 아픈 기억과 함께 몽유병이 왜 생기는지 그 이유를 정리해 보려 합니다.

자고 일어나면 낯선 곳에 서 있던 어린 날의 공포

어린 시절, 저는 분명 방에서 잠이 들었는데 눈을 뜨면 부엌이나 마당에 서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족들은 제가 잠결에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곤 했지요.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 사랑받고 싶던 어린 마음은 늘 긴장 상태였습니다. 새엄마의 눈치를 보느라 낮 동안 꾹 눌러 담았던 불안함이 밤마다 저를 밖으로 끌어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병인 줄도 모르고 어른들께 혼이 나기도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 서럽고 아픈 기억입니다.

몽유병은 도대체 왜 생기는 걸까요?

의학적으로 몽유병은 '수면 보행증'이라고 불립니다. 구글 로봇도 궁금해할 몽유병의 대표적인 원인 3가지를 정리해 드립니다.

  1. 뇌의 일시적인 혼란 때문입니다 우리가 깊은 잠에 빠졌을 때, 몸을 움직이는 뇌는 깨어나고 의식을 담당하는 뇌는 계속 자고 있을 때 발생합니다. 즉, 몸은 깨어 있는데 정신은 자고 있는 상태인 것이죠. 주로 뇌가 아직 다 발달하지 않은 어린아이들에게 많이 나타납니다.

  2. 심리적 스트레스와 과도한 피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스트레스입니다. 낯선 환경에 처하거나, 마음속에 억눌린 불안감이 클 때 몽유병 증상이 심해집니다. 제가 어린 시절 겪었던 환경적인 변화와 마음의 상처가 바로 제 몽유병의 방아쇠였던 셈입니다.

  3. 유전적인 요인과 수면 부족 부모님 중에 몽유병을 겪은 분이 있다면 자녀에게도 나타날 확률이 높습니다. 또한, 잠이 너무 부족하거나 불규칙한 생활을 할 때도 뇌가 충분히 쉬지 못해 이런 증상이 생길 수 있습니다.

몽유병을 겪는 아이를 둔 부모님께 드리는 조언

혹시 자녀가 밤에 돌아다닌다면 절대 억지로 깨우거나 다그치지 마세요. 갑자기 깨우면 아이는 극도의 공포를 느낄 수 있습니다. 대신 부드럽게 유도해서 다시 침대로 데려가 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아이의 마음속에 어떤 불안함이 있는지 따뜻하게 살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35년 장사를 하며 산전수전 다 겪고 나서야 그때의 저를 안아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몽유병은 단순한 버릇이 아니라, "나 지금 힘들어요"라고 말하는 마음의 신호였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혹시 지금 아이의 몽유병으로 고민 중이시라면, 아이의 마음을 먼저 따뜻하게 안아주시는 건 어떨까요?

[인생 이야기] 62년 인생과 35년 자영업, 묵묵히 길을 만드는 법

{인생 이야기}62년 인생과 35년 자영업, 묵묵히 길을 만드는 법

​안녕하세요. 포항에서 3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삶의 현장을 지켜온 자영업자이자, 8남매의 일곱째로 태어나 파란만장한 세월을 건너온 한 여자입니다. 
2026년 새해를 맞아 제가 블로그라는 새로운 세상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며칠간 글을 써 내려가며 느낀 막막함과, 그 속에서 찾은 저의 인생 철학을 공유해보려 합니다.

​처음은 누구에게나 낯설고 두렵습니다.

​블로그를 시작하고 며칠,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라는 고민이 깊어지는 밤이 많았습니다. 
하얀 화면 앞에 앉아 깜빡이는 커서를 보고 있으면, 35년 넘게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저조차도 한참을 망설이게 됩니다. 
나이도 있고 컴퓨터도 능숙하지 않다 보니, 이 새로운 소통의 창구가 가끔은 거대한 벽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가 걸어온 길 중에 처음이 아니었던 것은 없었습니다.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 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새어머니와 함께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했던 어린 시절도 처음이었습니다.
 15년의 침구 사업과 20년의 식당 운영을 처음 시작하던 날도, 지금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뿐이었습니다.

​35년 자영업 인생이 가르쳐준 '버티는 힘'

​저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 느껴질 때마다 겁을 내기보다 **'묵묵히 버티는 법'**을 선택했습니다. 
15년 동안 침구 홈패션 사업을 하며 천을 만지고, 20년 동안 식당 주방에서 불꽃과 씨름하며 배운 것은 기술만이 아니었습니다. 
길은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길이 된다는 진리였습니다.

​블로그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엔 하얀 백지처럼 막막하지만, 제가 현장에서 느끼고 배운 사소한 경험들부터 하나씩 채워가다 보면 언젠가 저만의 보물창고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62년 인생의 무게가 담긴 저의 기록들이, 누군가에게는 작은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살아갈 용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완벽함보다 소중한 것은 '꾸준한 기록'입니다

​블로그 두 개를 만들어 놓고 "이게 맞나" 싶어 망설여지는 날도 있습니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아도 일단 시작하고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저는 삶을 통해 배웠습니다. 아는 게 없으면 배워가면서, 제가 35년 현장에서 온몸으로 배운 인생의 지혜들을 하나씩 풀어내 보겠습니다.
​제 인생의 굴곡을 다 담아내기엔 블로그가 좁을지도 모르지만, 이 공간을 통해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분들과 소통하고 싶습니다.
 62세라는 나이는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가 아니라, 가장 깊은 맛을 낼 수 있는 나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함께 힘을 내는 새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혹시 저처럼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며 "이 길이 맞나" 고민하고 계신가요? 혼자라면 포기했을지 모르지만, 서로 응원하며 함께 힘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글솜씨지만 진심을 담아 하루하루를 기록하려 합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어두운 밤을 지나야 비로소 찬란한 아침이 오듯, 지금의 막막함이 내일의 기적을 만드는 씨앗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오늘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모든 분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인생 이야기] 7살의 눈물을 웃음으로 바꾼 1남 7녀, 우리들의 한복 나들이

[인생 이야기]7살의 눈물을 웃음으로 바꾼 1남 7녀, 우리들의 한복 나들이

안녕하세요. 오늘은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특별한 사진 한 장과 함께, 저희 8남매의 애틋한 이야기를 기록해보려 합니다.
 얼마 전 조카의 결혼식을 맞아 참으로 오랜만에 1남 7녀, 우리 8남매가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란히 서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니 지나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조카 결혼식 날,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1남 7녀의 모습입니다. 고운 한복만큼이나 빛나는 우리 형제들의 우애가 묻어나는 소중한 기록입니다."

1남 7녀, 한복으로 물들인 축복의 자리

​조카의 결혼식 날, 저희 일곱 자매와 유일한 아들인 우리 형제는 각자 고운 빛깔의 한복을 맞춰 입었습니다. 
흔치 않은 1남 7녀라는 대가족이 한복을 입고 서 있으니, 예식장에 오신 많은 분이 "어쩜 이렇게 다복하고 화목하냐"며 부러운 시선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시선이 쑥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긴 세월을 함께 버텨온 우리 형제들이 너무나 대견해 어깨가 으쓱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일곱 살의 이별, 그리고 새엄마와 시작된 8남매의 운명

​우리에겐 남들에게 쉽게 꺼내지 못한 아픈 유년 시절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겨우 일곱 살 되던 해, 친엄마는 저희 8남매를 두고 너무나 일찍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엄마의 온기가 무엇인지도 채 알기 전, 그 커다란 빈자리를 채우러 오신 새엄마와 함께 저희 8남매의 복작거리는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새엄마 밑에서 자라며 때로는 서럽고, 때로는 밤잠 설쳐가며 눈물짓던 날도 참 많았습니다. 8명이라는 많은 입이 먹고사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시절,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 험난했던 고비마다 우리가 손을 놓았다면 지금의 이 웃음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엄마, 우리 참 잘 컸죠?"

​사진 속 우리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마음속으로 돌아가신 엄마를 불러봅니다. 
그 어린 날, 엄마 손을 놓지 않으려 울며 매달리던 울보들이 이제는 다들 누군가의 든든한 부모가 되고, 고모가 되고, 이모가 되었습니다.

​세월의 풍파에 머리엔 어느덧 하얀 서리가 내려앉고 얼굴엔 주름이 깊어졌지만, 형제들 곁에 있으면 우리는 다시 그 옛날 코흘리개 어린 시절로 돌아갑니다. 
조카의 결혼을 축하하며 환하게 웃고 있는 우리를 보며 혼잣말로 되뇌어 봅니다. "엄마, 보고 계시죠? 우리 이만하면 정말 잘 컸죠?"

​엄마가 남겨주신 가장 위대한 유산, '형제'

​살다 보면 혼자서는 절대 넘지 못할 높은 산들이 앞을 가로막곤 합니다. 
저 역시 35년 넘는 긴 시간 동안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부딪히며 쓰러지고 싶을 때가 참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저를 일으켜 세운 것은 바로 우리 여덟 형제였습니다.
 혼자 짊어졌다면 꺾였을 무게를 여덟 명이서 나누어 짊어지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친엄마가 저희에게 남겨주신 가장 큰 재산은 금전도 명예도 아닌, 바로 이 '형제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나의 편, 비바람이 불어도 함께 비를 맞아줄 우리 1남 7녀. 우리가 함께라면 앞으로 다가올 그 어떤 세월도 두렵지 않습니다.

​마치며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시련 속에서 더욱 단단해진다는 것을 우리 8남매를 보며 다시금 느낍니다. 여러분도 오늘 곁에 있는 형제, 자매에게 "함께해 줘서 고맙다"는 따뜻한 메시지 하나 보내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 작은 진심이 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됩니다. 우리 1남 7녀 형제들,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인생 이야기] 일곱 살의 서러움이 만든 다짐, "나는 엄마라는 이름을 지켰다"

[인생 이야기]일곱 살의 서러움이 만든 다짐, "나는 엄마라는 이름을 지켰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이곳에 한 여자의 파란만장한 인생, 그리고 '엄마'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저의 기록을 시작해보려 합니다. 제 인생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다짐은 제가 고작 일곱 살이던 해에 시작되었습니다.

​일곱 살, 엄마 없는 시린 겨울을 마주하다

​저는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일곱 살 되던 해, 저희를 따뜻하게 품어주시던 어머니께서 너무나 일찍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엄마 없는 서러움이 무엇인지, 그 빈자리가 얼마나 차갑고 무서운 것인지 저는 뼛속 깊이 새기며 자라야 했습니다.
​어머니의 온기가 그리워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던 일곱 살 소녀의 가슴에는 커다란 응어리가 맺혔습니다. "내 자식들에게는 절대로 이 서러움을 물려주지 않으리라." 그 어린 가슴에 새긴 이 다짐은 제가 어른이 되고, 가정을 꾸리고, 한 어머니의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 저를 지탱해준 유일한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도망치고 싶은 순간마다 나를 붙잡은 '일곱 살의 나'

​사람으로 살다 보면, 그리고 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로 살다 보면 누구나 '그만두고 싶다',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하는 절망적인 순간이 오기 마련입니다.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파도가 밀려올 때, 저라고 왜 쉬운 길을 가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그럴 때마다 제 마음속에 살고 있는 일곱 살의 나를 떠올렸습니다. 엄마 없는 빈자리가 얼마나 시린 겨울인지 너무나 잘 알기에, 내 소중한 아들 하나와 딸 둘에게는 절대로 그 황량한 풍경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서러움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저는 이혼이라는 쉬운 길 대신 버티고 인내하는 고단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35년의 세월, 울타리가 되어준 엄마의 이름

​아이들의 울타리가 되어주기 위해 저는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었습니다. 3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자영업자로 살며 거친 풍파를 견뎌낸 것도, 사실은 제 아이들이 비바람에 젖지 않게 하려는 엄마의 본능이었습니다. 장사를 하며 겪은 수많은 고초와 눈물 나는 순간들 속에서도 제가 끝까지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집으로 돌아갔을 때 나를 반겨주는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날도 있었지만, 엄마라는 이름은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이제는 어느덧 장성하여 제 몫을 다하는 아이들을 보며, 그 모진 세월을 버텨낸 제 자신에게 나지막이 말해줍니다. "잘했다, 참 잘 버텼다. 너는 약속을 지켰구나."

​기록의 시작: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낸 한 여자의 이야기

​오늘부터 제가 써 내려갈 이야기는 단순히 고생하며 살아온 과거의 회상록이 아닙니다. 한 여자가 '엄마'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냈는지에 대한 투쟁 기록이자, 동시에 승리의 기록입니다.
​8남매의 일곱째로 태어나 일곱 살에 어머니를 여읜 아이가, 어떻게 세 아이의 든든한 나무가 되었는지 그 과정들을 하나씩 풀어놓으려 합니다. 저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다시 일어설 용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026년 2월 13일 금요일

[인생 이야기] 35년 전, 양수 터지는 줄도 모르고 바느질하던 그날의 출산기

[인생 이야기] 35년 전, 양수 터지는 줄도 모르고 바느질하던 그날의 출산기

​남자들은 모이면 군대 시절 고생한 이야기를 훈장처럼 늘어놓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 여자들에게는 그보다 더 치열하고 생생했던 '출산'이라는 인생의 전장이 있습니다. 
가르쳐주는 이 없어도 본능으로 견뎌냈던, 제 인생의 첫 번째 출산 이야기를 담담히 기록해 보려 합니다.

​홈패션 작업대 앞에서의 만삭의 하루

7살 어린 나이에 친정엄마를 여의고 새어머니 밑에서 자란 저에게 ‘출산’은 막막한 숙제와 같았습니다.
 35년 전, 첫 딸을 가졌을 때 저는 홈패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좁은 작업실에서 만삭의 몸으로 원단을 끊고 미싱을 돌리며 하루를 보냈지요. 
그때는 양수가 터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몰랐습니다. 
그저 몸이 조금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낳으러 가기 직전까지 작업대 앞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하리만큼 용감했던 초보 엄마였습니다.

"든든히 먹어야 힘을 쓰지!" 이웃 아주머니의 조언

진통이 간간이 밀려오는데 가게를 지나던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제 배를 보더니 깜짝 놀라시더군요. 
"새댁, 애 낳으러 갈 때 배고프면 힘 없어서 못 낳아. 무조건 든든히 먹고 가!" 친정엄마가 계셨다면 "너무 많이 먹으면 나중에 고생한다"고 일러주셨겠지만, 저는 그 아주머니 말씀이 정답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 말만 믿고 밥을 꾹꾹 눌러 한 그릇 든든하게 먹고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관장과의 사투, 그리고 엄마의 기도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의사 선생님의 호통이 떨어졌습니다. 
"양수가 이미 다 터졌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참았느냐"는 것이었죠. 
그 당혹감도 잠시, 든든하게 먹고 온 밥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사실 애 낳는 고통보다도 관장 때문에 정신없이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게 훨씬 더 힘들고 진이 빠졌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제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습니다. 
"하나님, 제발 우리 아기만 무사히 나오게 해주세요. 
저는 아무리 아파도 괜찮으니 우리 아이만 건강하게 해주세요." 
내 몸이 타 들어가는 아픔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습니다.
 엄마가 된다는 건, 나보다 내 안의 생명을 더 귀하게 여기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습니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홀로 선 첫걸음

친정엄마의 따뜻한 조언 한마디 없었지만, 저는 몸으로 직접 부딪치며 엄마가 되는 법을 배웠습니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었고, 때로는 외로움이 스승이었습니다. 
밥 많이 먹고 가서 고생했던 그 서툴렀던 초보 엄마는, 그날 이후 비로소 한 아이를 책임지는 단단한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삶의 어떤 순간에도 "할 수 있다"고 외치게 된 저의 강인함은 아마 그 서툴렀던 첫 출산의 기억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2026년 2월 9일 월요일

[인생 이야기] 노란 위액을 토하며 견뎠던 그 시절, 당연하지 않았던 인내

[인생 이야기] 노란 위액을 토하며 견뎠던 그 시절, 당연하지 않았던 인내

​35년 장사 인생을 돌아보면 참 모진 세월을 잘도 버텼다 싶습니다. 
하지만 그 맷집 좋던 저도 문득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기억이 있습니다. 
바로 첫딸을 임신했을 때, 지독했던 멀미와 입덧을 견디며 시댁으로 향하던 그 길에 대한 기록입니다.

​1. 비포장도로 위, 지옥 같았던 시외버스 60분

​저는 본래 차 멀미가 유독 심한 체질입니다. 
지금도 차만 타면 속이 울렁거려 대중교통 이용이 쉽지 않은데, 당시 임신 입덧까지 겹친 상태에서의 버스 이동은 말 그대로 '고문'이었습니다. 
그 당시엔 자가용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 시외버스를 타고 40분을 달려가, 다시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20분을 더 가야 시댁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도로는 지금처럼 매끄럽지 않았습니다.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의 진동, 그리고 차 안을 가득 채운 독한 경유 냄새는 제 감각을 마비시켰습니다. 
10분만 지나도 식은땀이 비 오듯 흐르고 눈앞이 노랗게 변했습니다. 
뱃속 아이를 생각해 뭐라도 먹어야 했지만, 입덧 때문에 속은 이미 비어 있었고 나올 것이 없는데도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노란 쓴물이 올라올 때까지 구역질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노란 위액을 토해내며 간신히 버티던 그 60분은 제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이었습니다.

​2. 도착한 시댁, 쉴 곳 없던 며느리의 주방

​기진맥진해서 시댁 대문을 들어서면 당장이라도 차가운 방바닥에 쓰러져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임산부 며느리를 위한 배려는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멀미로 하얗게 질린 제 얼굴을 보며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시댁 오기 싫어서 일부러 꾀병 부리는 것 아니냐"는 차가운 말들을 던졌습니다.
​그 서슬 퍼런 눈치 속에서 저는 눕는 대신 주방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속은 여전히 뒤집혀 비릿한 음식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이 올라왔지만, 주방 한구석에서 설거지를 하고 나물을 다듬으며 일손을 보탰습니다. "나도 사람인데, 나도 임신해서 힘든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8남매 중 일곱째로 자라며 배운 '인내'라는 굴레가 제 입을 꾹 닫게 만들었습니다.


​3. 가장 가까운 보호자, 남편의 야속한 외면

​가장 야속한 것은 단연 남편이었습니다. 
버스 안에서 제가 노란 쓴물을 쏟아내며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옆에서 지켜본 유일한 목격자가 바로 남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댁 식구들이 저를 꾀병으로 몰아세울 때, 남편은 제 편이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본인 어머니의 말에 동조하며 저를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아내의 하얗게 질린 입술보다 어머니의 기분을 살피는 것이 효도라고 믿었던 그 사람. 가장 의지해야 할 남편이 '남의 편'이 되어 저를 사지로 몰아넣는 것 같은 기분은 노란 위액보다 더 쓰고 비참하게 가슴에 남았습니다. 
요즘 세상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당시의 제 남편은 유독 그 고집과 무심함이 심했습니다.

​4. 시대를 버텨온 모든 어머니께 건네는 위로

​돌이켜보면 그 시절 대부분의 여성이 비슷한 무게를 견디며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들 그렇게 살았다"는 말이 제 상처를 지워주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 모진 시간을 묵묵히 버텨냈고, 그 독한 인내가 지금의 저를 만든 밑거름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35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나처럼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아픔을 숨기고 있을 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당신의 고통은 당연한 것이 아니며, 당신은 그 무엇보다 먼저 보호받아야 할 소중한 사람이라고요. 
저는 이제 블로그라는 저만의 공간에서 그 시절 삼켜야 했던 노란 쓴물의 기억들을 하나씩 쏟아내며 스스로를 치유해 보려 합니다.

2026년 2월 4일 수요일

[인생 이야기]나이 똑같은 형님, 나, 시누이... 왜 나는 그들에게 항상 '만만한 남'이었을까

[인생 이야기]나이 똑같은 형님, 나, 시누이... 왜 나는 그들에게 항상 '만만한 남'이었을까

1. 친정엄마라는 빈자리를 정성으로 채우려 했던 진심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8남매 사이에서 자란 저에게 '어머니'라는 존재는 평생을 따라다니는 아련한 그리움이었습니다. 
결혼 후 만난 시어머니를 보며 저는 다짐했습니다. '내 친정엄마처럼 모시자, 내가 정성을 다하면 이분도 나를 딸처럼 아껴주시겠지'라고요. 
8남매 틈바구니에서 몸에 밴 인내와 배려를 시댁에서도 고스란히 발휘하며, 저는 누구보다 착한 며느리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수한 정성은 저의 가장 큰 약점이 되어 돌아왔고, 저를 향한 부당한 대우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2. 도시 깍쟁이 형님과 시골 출신 둘째 며느리

​저희 시댁에는 참 보기 드문 인연이 있었습니다. 맏며느리인 형님과 나, 그리고 손아래 시누이까지 세 명의 나이가 똑같았던 것입니다. 동갑내기 세 여자가 한 집에 모였으니 남들은 친구처럼 지낼 법도 하다고 했지만, 시어머니의 잣대는 냉정했습니다.
​형님은 세련된 도시 여자였습니다. 
은근히 깍쟁이 기질이 있어 자기 실속을 똑 부러지게 챙겼고, 장남인 아주버님 또한 기세가 당당해 시어머니조차 형님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늘 눈치를 보셨습니다.
 반면 시골 출신인 저는 시어머니 눈에 그저 만만하고 부리기 좋은 둘째 며느리일 뿐이었습니다. 도시 깍쟁이 형님은 어려워서 대접해주고, 시골 출신인 저에게는 마음 놓고 감정을 쏟아내는 차별이 일상이었습니다.

​3. 그 시절 어느 집이나 비슷했던 '끼인 둘째'의 비애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시댁만 그랬던 건 아닐 겁니다.
 그 시절 어느 집이든 장남은 집안의 기둥 대접을 받았고, 막내는 그저 늦둥이라 깨물면 아픈 손가락처럼 귀함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그 사이에 낀 둘째였습니다. 
딸 하나에 아들 셋인 집안에서 둘째 아들과 결혼한 저는, 시어머니에게 가장 '편한' 존재이자 화풀이 대상이었습니다.
​남편 또한 결혼하자마자 지극한 효자가 되어 저에게 매일 시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하라고 강요하며 본인의 효도를 며느리인 저에게 떠넘겼습니다. 
60만 원 삭월세에서 시작해 장사 밑천을 모으느라 손등이 터져가며 일하던 시절, 남편은 제 고생보다 자기 엄마와 동생의 기분을 딸보다 더 조근조근 맞춰주는 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아들이 내 편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시어머니의 의기양양함은 대단했습니다.
그시절  시어머니들이 다 그랬을까요?

4. 아직 아이도 없던 시절, 왜 나는 도망치지 못했을까

​참 바보 같았습니다.
 아직 아이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왜 그 부당한 대우를 다 견디며 살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만약 그때 제가 지금처럼 세상을 알았거나 조금 더 영악했더라면, 그 모진 시집살이를 시작도 안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엄마 없는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가정을 지키고 싶었고, 그 착한 마음이 결국 저를 '무시해도 되는 남'으로 만들었습니다.
​친정엄마가 계셨더라면 "너 왜 그러고 사느냐"며 제 손을 잡아 끌어주셨을까요?
시어머니께 다했던 그 무수한 진심이 서러움으로 돌아왔을 때의 허망함은 35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한구석에 시린 흉터로 남아있습니다. 
이제는 그 서러웠던 시절의 저를 안아주며, 제 인생의 주인으로서 이 아픈 기록들을 하나씩 남겨보려 합니다.

2026년 2월 3일 화요일

[인생 이야기]60만 원 삭월세에서 이룬 자수성가, 그리고 시어머니와의 갈등을 통해 배운 삶의 당당함

[인생 이야기]60만 원 삭월세에서 이룬 자수성가, 그리고 시어머니와의 갈등을 통해 배운 삶의 당당함

1. 20대 후반, 가난했지만 뜨거웠던 시작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자란 저에게 '가정'은 늘 지키고 싶은 소중한 꿈이었습니다. 
결혼생활의 시작은 60만 원 삭월세 단칸방이었지만, 저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좁은 방은 제가 더 큰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죠. 15년의 홈패션 경력과 이후 20년의 식당 운영을 가능케 했던 저의 억척스러운 근성은 바로 이 삭월세 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2. 1년 만에 달성한 전셋집 장만과 예기치 못한 갈등

​잠을 줄이고 먹고 싶은 것을 아껴가며 오로지 '내 집, 내 가게'를 목표로 달린 지 딱 1년. 드디어 2,000만 원이라는 전세금을 모아 가게가 딸린 새집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기쁨도 잠시, 이삿날 찾아오신 시어머니는 축하 대신 비수를 꽂으셨습니다.
 "혼수를 제대로 해오지 않아 집안이 초라하다"는 트집이었습니다.

​3. 부당한 대우에 던진 당당한 한마디: "혼수 대신 선택한 장사 밑천"

​평소 기가 센 시어머니 밑에서 남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참아왔던 저였지만, 그날만큼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제 노력이 부정당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당찬 한마디가 터져 나왔습니다.
​"어머니, 그럼 어머니도 친구분들처럼 든든한 전셋집 하나 구해주셔요. 그러면 우리 아버지도 논 팔아서라도 혼수 최고로 해주실 거예요. 혼수 할 돈 아껴서 장사 밑천 삼아 1년 만에 이 집 마련한 거 모르시나요?"
​이 말 한마디에 평소 기세등등하던 시어머니도 입을 꾹 다무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말대꾸가 아니라, 제 삶에 대한 정당한 방어였죠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 얘기할수 있었는지 신기할 따름이죠. 그날처럼  다는것들도 참지않고 맞섰으면 좋았을텐데 라는 생각을  두고두고 하게됩니다.

​4. 시집살이의 눈물을 버티게 한 것은 결국 '엄마'라는 이름

​지금 돌아보면 20대 후반의 저는 참으로 여리고 순수했습니다. 
만약 그때 제가 지금처럼 영악했거나 나만을 생각했다면, 아이가 생기기 전 부당한 대우를 견디지 못하고 다른 길을 선택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가정을 지키고 싶었고, 제 꿈을 꺾이게 하고싶지 않았읍니다.

​5. 인생의 고난을 대하는 자세

​그 후로도 시어머니와의 갈등은 계속되었고 저는 수차례 울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진 시간들은 저를 더 단단하게 단련시켰습니다. 
부당한 상황에서도 내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진심을 다해 노력하면 반드시 결과로 보상받는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35년 자영업 인생의 기초는 화려한 혼수가 아니라, 바로 그 서러운 눈물을 닦으며 세운 '오기'와 '열정'이었습니다.

다음편에는  결혼하고 갑자기 효자노릇하는  아들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인생 이야기] 전셋집 대신 장사 밑천을 택한 60만원 삵월세의 결단

[인생 이야기] 전셋집 대신 장사 밑천을 택한 60만원 삵월세의 결단

1. 2,000만 원 전셋집 대신 택한 60만 원 삯월세의 삶

​35년 전, 우리 부부가 처음 손을 잡고 인생이라는 망망대해로 나설 때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였습니다. 
남들처럼 번듯한 전셋집에서 신혼을 시작하느냐, 아니면 당장의 안락함을 포기하고 미래를 위한 종잣돈을 만드느냐였습니다. 제가 살던 지방에서도 당시 괜찮은 전셋집을 구하려면 2,000만 원에서 3,000만 원 정도는 있어야 했습니다. 8남매 중 일곱째로 자라며 일찍이 세상 물정을 깨우쳤던 저에게 그 큰 전세금은 감당하기 버거운 현실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우리가 가진 전 재산을 주거비로 묶어두는 것이 못내 아깝게 느껴졌습니다.
​결국 우리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우리만의 방식을 택했습니다. 
보증금 없이 10달치 방세를 미리 내는 '60만 원 삯월세' 단칸방이 우리의 첫 보금자리였습니다. 
문을 열면 바로 코앞이 부엌이고,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차는 초라한 방이었지만, 그 선택 덕분에 우리는 전세금으로 들어갈 뻔한 소중한 자금을 고스란히 장사 밑천으로 돌릴 수 있었습니다.

​2. 혼수도 생략하고 살림살이도 최소화한 '현실 신혼'

​삯월세 단칸방에 들어가면서 화려한 혼수는 사치였습니다. 
방 하나에 부엌 하나가 전부인 그 좁은 공간에 남들 다 하는 커다란 장롱이나 화장대를 들일 자리는 애초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필요한 최소한의 살림살이만 갖추고 들어갔습니다. 
이불 몇 채와 냄비 몇 개가 우리 살림의 전부였지요. 
혼수 대신 우리가 선택한 것은 시장 골목 한구석의 조그만 '홈패션 가게'였습니다.
​남들은 신혼 가구 보러 다닐 때, 저는 시장 바닥에서 미싱을 돌리고 원단을 끊어왔습니다. 
비록 남들 보기에 시작은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살림이었지만, 저는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좁은 방에서 아침마다 가게로 나설 때의 그 설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60만 원 삯월세방은 잠만 자는 곳이었고, 저의 진짜 인생은 시장 골목 미싱 앞에서의 치열한 삶 속에 있었습니다.

​3. "노력하면 안 될 게 없다"는 패기로 일궈낸 세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의 저에게는 정말 대단한 '패기'가 있었습니다. 
누구의 도움 없이 맨손으로 시작했기에 두려울 것도 없었습니다. 
"젊으니까 몸으로 때우면 된다", "열심히 노력하면 세상에 안 될 게 없다"는 무모하리만큼 뜨거운 믿음이 저를 지탱해주었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가더라도 우리만의 힘으로 일어서겠다는 그 고집이 있었기에, 3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자영업의 풍파를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결혼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과 집을 합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미래를 설계하고 고난을 이겨낼 동지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2,000만 원 전셋집이 주는 안락함보다 60만 원 삯월세가 주는 절박함이 저를 더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많은 분, 특히 새로운 시작을 앞둔 젊은 세대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시작의 모습이 조금 초라하다고 해서 결코 인생까지 초라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결핍과 패기가 당신을 가장 강력한 성공의 길로 안내할 것입니다.

2026년 2월 2일 월요일

[인생 이야기 ]7살 소녀의 결핍과 헛간 소동이 바꾼 운명

[인생 이야기 ]7살 소녀의 결핍과 헛간 소동이 바꾼 운명

1. 동병상련의 인연, 그러나 너무나 달랐던 환경

저와 남편은 참 기구한 인연으로 만났습니다. 
저도 7살에 엄마를 잃었고, 남편 역시 7살에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똑같은 상처를 안고 만났기에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줄 알았지만, 살아온 환경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저는 8남매 중 일곱째로 자라며 "엄마 없는 자식 소리 듣지 마라"는 말을 뼈에 새기고 누구보다 예의를 지키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처음 마주한 남편의 집안은 무질서하고 예의가 부족한 모습이었습니다.

​2. 결혼을 앞두고 내린 단호한 결단

결혼 전 인사차 방문한 시댁에서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평생 소중히 여겨온 '도리'와 '예절'이 보이지 않는 분위기에 마음이 상했습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남편에게 솔직한 심경을 전했습니다. 
"나를 환영하지 않는 것 같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도저히 결혼할 수 없다"며 인연을 정리하자고 했습니다. 
굳이 그런 환경에 들어가 저 자신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헛간 소동과 예기치 못한 선택

하지만 며칠 뒤, 남편은 저를 다시 본가로 데려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습니다. 
결혼을 반대한다면 헛간에 불을 지르겠다며 소동을 피운 것입니다. 
평생 조심스럽게 살아온 저에게 그런 돌발 행동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때는 그 불같은 모습이 저를 향한 지독한 사랑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놀란 마음에 남편을 말리고 수습하다 보니, 결국 어찌어찌 결혼이라는 문턱을 넘게 되었습니다.

​4. 35년 세월이 준 뼈저린 깨달음

살아보니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지독한 성질머리였습니다. 
사람 고쳐 쓰는 것 아니라는 옛말을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성미를 받아내며 15년은 침구 장사를, 20년은 식당을 하며 제 몸 아끼지 않고 억척스럽게 살아야 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그 성질머리를 사랑으로 착각하고 간파하지 못한 제 자신이 참으로 미련했습니다.

​5. 인생의 갈림길에 선 이들에게 전하는 조언

혹시라도 저처럼 "나 아니면 이 사람 어쩌나" 하는 동정심이나 오기로 고민하는 분이 있다면, 저는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아니다 싶은 인연은 그 자리에서 엎는 것이 맞습니다. 
바보같이 그것을 몰라서 고생했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지만, 저의 이 쓰라린 기록이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이정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남깁니다.

[인생 이야기]시어머니의 위대한 헌신, 그러나 남겨진 '가정교육'의 뼈아픈 빈자리

[인생 이야기]시어머니의 위대한 헌신, 그러나 남겨진 '가정교육'의 뼈아픈 빈자리

1. 7살에 멈춰버린 우리 부부의 유년기

​참 기구한 인연입니다.
 저도 7살에 엄마를 잃었고, 제 남편도 7살에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똑같이 부모 한쪽을 잃은 결핍을 안고 만났지만, 그 상처를 대하는 집안의 태도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저는 8남매 중 일곱째로 자라며 "엄마 없는 자식 소리 듣지 마라"는 말을 뼈에 새기며 살았습니다. 
남들보다 더 깍듯하게 인사하고, 더 부지런히 움직이며 제 자존심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집안은 그 비극을 거친 무질서로 채워나갔습니다.

​2. 재가도 하지 않고 4남매를 거둔 시어머니의 위대함

​사실 며느리인 제가 봐도 제 시어머니는 참으로 대단하고 위대한 분이십니다. 
7살 어린 아들을 포함해 4남매를 두고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젊은 나이의 시어머니는 재가도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식들을 위해 인생을 바치셨습니다. 
시장통 생활전선에서 거친 풍파를 온몸으로 맞으며 그 어린것들을 굶기지 않고 다 키워내신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숭고한 헌신입니다. 
그 억척스러운 세월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 남편도 없었겠지요.

​3. 헌신 속에 놓쳐버린 '예의'라는 가장 큰 유산

​하지만 저는 지금도 자꾸만 되묻게 됩니다. 그토록 자식들을 사랑하셨다면, 왜 그들을 더 엄하게 가르치지 못하셨을까요. 
자식들을 굶기지 않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 노릇'을 가르치는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시어머니가 밖에서 장사하며 고생하시는 동안, 4남매는 집안에서 예절도 도리도 배우지 못한 채 방치되었습니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시어머니는 그럴수록 자식들의 예의를 더 매섭게 잡아주셨어야 했습니다.

​4. 살아남은 자가 느끼는 지독한 예의의 부재

​남편과 그 형제들은 부모의 보살핌 대신 각자 알아서 살아남는 법만 배웠습니다. 
그 결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말 한마디의 무게를 전혀 모르는 어른들로 자라버렸습니다.
 제가 35년 장사 인생을 살며 가장 힘들었던 건 손님들의 갑질이 아니었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선을 넘고 무례하게 구는 시댁 식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부모가 없어서 그렇다는 핑계를 대지만, 저 역시 엄마 없이 자랐기에 그 말이 얼마나 비겁한 변명인지 너무나 잘 압니다.

​5. 35년, 이 척박한 환경에서 내가 살아남은 이유

​결혼과 동시에 시작된 장사, 그리고 그보다 더 고달팠던 예의 없는 집안에서의 생활. 저는 지금도 말합니다. 
"나는 이 집안에서 살아남았다"고요. 
시어머니의 헌신은 고맙고 위대하지만, 그로 인해 면죄부를 받은 남편 식구들의 무례함은 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었습니다. 
저는 제 아이들에게만큼은 절대로 이 굴레를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35년 세월 동안 제 자존심을 지켜왔습니다. 
이제 이 굴곡진 기록을 통해, 7살에 엄마 여읜 소녀가 어떻게 그 척박한 곳에서 반듯한 나무로 살아남았는지 하나씩 풀어내려 합니다.

​"제가 이 모진 세월을 하나하나 기록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저처럼 엄마 없는 서러움을 장사로 달래며, 예의 없는 환경 속에서 억울하게 자신을 깎아 먹으며 사는 사람이 더는 없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제 못난 인생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넘어지지 않는 지팡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인생이야기: 입덧 속에 치러진 상가 계약, 35년 전 그날의 서글픈 풍경

  인생이야기: 입덧 속에 치러진 상가 계약, 35년 전 그날의 서글픈 풍경 첫째 때부터 이어진 장사, 그리고 입덧과 함께 찾아온 둘째 저는 첫째 아이를 키울 때부터 이미 장사 전선에 뛰어들어 쉼 없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홈패션 가게를 꾸려가며 8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