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31일 토요일

[인생이야기] 대기업 취직한 아들이 '돈줄'로 보였던 시어머니, 그 독점욕이 부른 비극

[인생이야기] 대기업 취직한 아들이 '돈줄'로 보였던 시어머니, 그 독점욕이 부른 비극

어머니 없이 자란 설움에 예의 하나만큼은 철저히 지키며 살아온 저였습니다. 딸 많은 집 딸들이 엄마 없이 자란다고 손가락질받을까 봐, 노심초사하시며 엄격히 예의를 가르치셨던 우리 아버지가 계셨기에 저는 평범한 결혼을 꿈꾸며 살았습니다.

특히 첫 인사 가는 날, 저는 제 옷차림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쏟았습니다. 혹시라도 구겨진 옷자락 하나 때문에 "역시 엄마 없는 자식이라 티가 난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몇 번이고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를 다듬었습니다. 단정하고 깨끗한 옷차림은 저에게 단순한 치장이 아니라, 저를 귀하게 키워주신 아버지의 자부심이자 제 마지막 자존심이었습니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찾아간 35년 전 첫 인사 자리.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시어머니의 태도는 제 상식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배를 깔고 누워 "왔나" 한마디로 사람을 투명인간 취급하던 그 무례함. 나중에야 알게 된 그 속마음은 더욱 기가 막혔습니다. 시어머니는 애초에 아들을 결혼시킬 생각이 없으셨던 겁니다.

1. 며느리가 아니라 아들의 돈을 가로챌 '방해꾼'이었던 나

고생해서 키운 아들이 대기업에 취직하자마자 결혼을 하겠다고 하니, 시어머니 눈에는 제가 '아들이 벌어올 돈을 가로채러 온 사람'으로 보였나 봅니다. 청상과부로 홀로 자식들을 키운 보상을 아들의 월급봉투로 받고 싶으셨겠지요. 아들이 돈 좀 벌어서 집안 살림도 좀 피게 해주고, 본인 호강도 시켜준 다음에나 장가를 보내고 싶으셨던 그 지독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 욕심 때문에 저라는 한 사람의 인격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단정하게 차려입고 간 제 정성 어린 모습보다, 제가 아들의 월급봉투를 나눠 가질 존재라는 사실에만 분노하셨던 겁니다. "엄마 없는 자식이라 살림이나 하겠냐"며 던졌던 비수 같은 말들도, 사실은 제가 싫어서가 아니라 아들을 놓아주기 싫어서 부렸던 심술이었습니다. 자식의 행복보다 자식이 벌어올 돈을 먼저 계산했던 그 이기적인 마음이, 한 젊은 여자의 인생을 얼마나 처참하게 짓밟았는지 시어머니는 끝내 모르셨을 겁니다.

2. 35년 장사 인생으로 증명하려 했던 서러운 오기와 눈물

그때 저는 바보같이도 "내가 더 열심히 벌고, 내가 더 잘하면 어머니 마음이 돌아서겠지"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15년 이불 장사, 20년 식당 장사를 하며 억척스럽게 살았습니다. 시어머니가 그렇게 바라던 '돈'을 보란 듯이 벌어보겠다고 몸이 부서져라 일했습니다. 제가 예의 없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 그리고 우리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지 않으려 그 모진 세월을 버텨낸 것입니다.

식당 주방에서 뜨거운 불 앞에 서 있을 때도, 이불 보따리를 짊어지고 다닐 때도 제 머릿속엔 오직 하나뿐이었습니다. '어머니, 저 이렇게 잘 살고 있습니다. 저 돈도 잘 벌고 살림도 잘합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인정해 주세요.' 하지만 돌아오는 건 늘 차가운 시선과 더 큰 요구뿐이었습니다. 사람의 인정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모진 풍파를 다 겪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35년이라는 긴 세월을 오직 그 '오기' 하나로 버텼던 제 청춘이 참으로 가엽게 느껴지는 밤입니다.

3. 돈보다 귀한 것이 사람의 마음임을 깨달으며

하지만 35년이 지나 깨달은 것은, 사람을 돈줄로 보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다주어도 만족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들의 앞길을 축복해 주기보다 자신의 노후 대책으로 삼으려 했던 시어머니의 그 '본데없는' 욕심이 결국 우리 가족 모두의 가슴에 깊은 멍을 들게 했습니다. 만약 그때 그 욕심 어린 눈빛을 더 정확히 읽었더라면, 저는 제 소중한 청춘을 그런 무례함 속에 던져두지 않았을 겁니다.

이제야 깨닫습니다. 돈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지만, 한 사람의 인격을 짓밟으며 쌓은 욕심은 결국 비극으로 돌아온다는 것을요. 35년 장사 고비마다 저를 일으킨 건 돈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겠다'는 의지였습니다. 혹시 지금 누군가의 무례함 때문에 가슴앓이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상대의 비뚤어진 욕심에 당신의 귀한 인생을 너무 오래 맡겨두지 마세요.

인생이야기 [결혼과삶] 35년 차 아내가 고백하는 진심, "다시 태어난다면 결혼 안 합니다"

인생이야기 [결혼과삶] 35년 차 아내가 고백하는 진심, "다시 태어난다면 결혼 안 합니다"

8남매 중 일곱째 딸. 엄마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7살 어린 나이에 저는 엄마를 여의었습니다. 새엄마 밑에서 눈치껏 자라며 제가 배운 것은 '내 편 하나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이었습니다. 따뜻한 밥 한 끼보다 엄마의 온기가 더 그리웠던 그 시절, 저에게 결혼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과 사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나를 지켜줄 유일한 울타리이자, 일찍 잃어버린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줄 안식처를 찾는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하지만 35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순진했던 저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 울타리가 네 온몸을 옥죄고, 네 인생을 통째로 갈아 넣어야 유지되는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단다"라고요.

엄마 없는 설움이 만든 성급한 울타리, 그 뒤에 가려진 혹독한 대가

그때의 저는 결혼이라는 문을 열면 꽃길만 펼쳐질 줄 알았지, 그 뒤에 기다리는 혹독한 시집살이와 가장의 무게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려 선택한 결혼이었는데, 정작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엄마의 온기가 아니라 시어머니의 서슬 퍼런 눈치와 끝없는 가사 노동, 그리고 장사의 고단함이었습니다. 7살 어린 소녀가 꿈꿨던 안식처는 온데간데없고, 저는 어느덧 한 집안의 운명을 짊어진 무거운 '가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어리광 한번 부려보지 못한 채, 저는 그렇게 어른이 되기도 전에 '아내'와 '며느리'라는 무거운 이름표를 달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가 가졌던 불안함은 심리학적으로 보면 '애착의 결핍'을 채우려는 시도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채 뛰어든 결혼 생활은 제 자아를 찾기도 전에 타인을 위한 삶으로 저를 몰아넣었습니다.

35년 세월, 내 이름 석 자 대신 남겨진 거친 손마디와 식당의 눈물

결혼은 둘이 만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전쟁터였습니다. 한 남자의 아내가 되는 순간, 저는 내 이름 석 자를 잃어버렸습니다. 시어머니의 며느리로, 시누이들의 올케로, 그리고 곧이어 태어난 아이들의 엄마로만 불리며 35년을 살았습니다. 마음의 병을 앓는 남편을 다독이며 가게를 지켜야 했고, 시어머니 밑에서 숨 한 번 크게 쉬지 못하고 눈치를 보며 살았습니다.

15년은 이불 장사로, 20년은 식당 사장으로 살며 제 손마디는 굵어지고 거칠어졌지만, 정작 제 마음의 상처는 돌볼 틈조차 없었습니다. "사장님 소리 들으며 돈 벌면 됐지"라고 남들은 쉽게 말하지만, 매일 아침 인건비를 단돈 만 원이라도 아끼려 새벽같이 일어나 직접 칼을 잡고 고기를 썰던 그 고단함을 누가 알까요. 고기를 썰며 떨어지는 것이 육즙인지 제 피눈물인지 모를 세월을 20년이나 버텼습니다. 손목이 시큰거리고 어깨가 무너져 내려도 "엄마는 괜찮다"는 말로 자식들을 안심시키며 살아온 세월이었습니다. 35년 장사 인생은 저에게 경제적 자립을 주었을지 모르나, 제 청춘과 바꾼 가혹한 거래이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누구의 무엇이 아닌 그냥 '나'로 살고 싶은 중년의 선언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고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35년 동안 앞치마 한 번 편히 풀어보지 못한 채, 가족이라는 이름의 짐을 짊어지고 달려온 저는 이제 지쳤습니다. 만약 지금 저에게 다시 35년 전 예식장에 서 있을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는 그 화려한 드레스를 과감히 벗어 던지고 제 갈 길을 찾아 떠날 것입니다. 누구의 아내도, 누구의 며느리도 아닌 그냥 '나'로서 자유롭게 세상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거창한 여행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저 해 지는 노을을 아무런 걱정 없이 바라보고, 누구의 끼니도 걱정하지 않은 채 오로지 나를 위한 차 한 잔을 마시고 싶을 뿐입니다. 희생이 미덕인 줄 알고 살았던 지난 세월을 뒤로하고, 이제는 제 자신의 행복을 우선순위에 두고자 합니다.

오늘 저는 그 길고 긴 전쟁 같은 결혼 생활의 첫 페이지를 블로그에 넘깁니다.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는 이 짧은 한마디 뒤에 숨겨진, 차마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이제 하나씩 꺼내 보려 합니다. 저처럼 가슴 한구석에 응어리 하나쯤 품고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아내분과 어머니분들, 제 투박하고 긴 기록이 여러분께 작은 위로와 공감이 되길 바랍니다. 인생의 후반전은 이제 누구의 며느리도, 엄마도 아닌 저 자신의 이름으로 당당히 살아가고 싶습니다.

2026년 1월 30일 금요일

인생이야기 [삶의전환점] 사라진 고향 집 대문을 닫으며, 이제 '결혼'이라는 고개를 넘으려 합니다

인생이야기 [삶의전환점] 사라진 고향 집 대문을 닫으며, 이제 '결혼'이라는 고개를 넘으려 합니다

그동안 제 블로그를 통해 사라져 버린 고향의 흙냄새와 8남매가 복작거리며 살았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30편이나 적어왔습니다. 이제는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이기에 제 기억 속의 고향은 더 아리고 애틋하기만 합니다. 7살 어린 나이에 친엄마를 여의고, 제가 나고 자란 그 집에 새엄마를 맞이하며 가슴앓이했던 기억들... 그 서럽고도 따뜻했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 놓다 보니 저도 잠시 그 시절 단발머리 소녀로 돌아가 참 많이도 울고 웃었습니다.

1. 30편의 기록으로 남긴 고향 집 마당, 이제는 잠시 안녕을 고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 소중한 기억 속의 고향 집 대문을 잠시 닫으려 합니다. 언제까지나 사라진 고향만 그리워하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오늘부터는 그 정든 마당을 나와, 제가 한 남자의 아내이자 한 가정의 며느리로 첫발을 내디뎠던 '결혼'이라는 새로운 인생의 고갯길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합니다.

고향 집 대문을 닫는다는 것은 제 인생의 1막을 마무리하는 의식과도 같습니다. 8남매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배웠던 그 마당에서의 기억은, 훗날 제가 3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불 장사와 식당 장사를 버텨낼 수 있게 한 가장 큰 자산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 기억들을 밑거름 삼아, 더 치열하고 뜨거웠던 2막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2. "만약 지금 태어났다면?" 솔직한 고백, "결혼 안 했을 겁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을 보면 참 당당하고 자유로워 보입니다. 혼자서도 자기 삶을 멋지게 꾸려가는 그들을 보며 가끔 저 스스로에게 묻곤 합니다. "만약 내가 지금 세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지금 같아선 결혼 안 했을 겁니다. 사라진 고향 집 마당에서 8남매 틈바구니를 견디며 배운 그 생활력과 손재주라면, 지금 세상에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하게 제 이름을 내건 일을 하며 멋지게 살았을 테니까요.

그 시절, 8남매 중 일곱째였던 저에게 결혼은 사실 선택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숙제 같았습니다. 엄마 없는 빈자리에 새엄마가 들어오고, 일찍 철이 들어버려야 했던 소녀에게 결혼은 어쩌면 그 답답한 집을 떠나 온전한 '내 편' 하나를 만들고 싶었던 간절한 탈출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또 다른 인내의 시작인 줄도 모른 채, 저는 그렇게 서둘러 어른의 세계로 뛰어들었습니다.

3. 익숙한 세상과의 작별, '결혼'이라는 낯선 바다로의 투신

이제는 지도에서도 사라진 고향 집 대문을 나섰던 그날, 저는 제가 알던 익숙한 세상과 작별하고 '결혼'이라는 낯선 바다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삶인 줄 알았습니다. 여자는 때가 되면 시집을 가야 하고, 남편 맞이하고 자식 낳으면 내 이름 석 자보다는 '누구 엄마'로 사는 게 미덕인 시대였으니까요.

스물몇 살, 꽃다운 나이에 하얀 드레스를 입고 찍은 사진 속의 나는 참 앳된 모습인데, 그때의 그 소녀는 알았을까요? 그날의 선택이 앞으로 30년 넘는 세월 동안 나를 오로지 가족을 위해 헌신하게 만들 줄을 말입니다. 사라져서 더 소중한 고향 이야기를 일단락 짓고 이제 결혼 이야기를 시작하려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누군가의 며느리로 시작해 엄마로 살아온 그 고단했던 첫 단추, 그리고 그 결혼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이제 하나씩 블로그에 내려놓아 보려 합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안 하겠다던 그 결혼이지만, 그 길을 걸어왔기에 만날 수 있었던 소중한 인연들과 제 인생의 뜨거웠던 순간들을 담담하게 기록해 보겠습니다. 이 기록이 저와 비슷한 길을 걸어온 수많은 이 땅의 어머니들께 작은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2026년 1월 28일 수요일

인생이야기 [도전과열정] 3년 늦게 입은 고등학생 교복, 그 '간절함'이 35년 장사 인생의 밑천이 되었습니다

인생이야기 [도전과열정] 3년 늦게 입은 고등학생 교복, 그 '간절함'이 35년 장사 인생의 밑천이 되었습니다

어제 제가 중학교를 졸업하고도 형편 때문에 바로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3년이나 지난 뒤에야 어렵사리 고등학교에 갔던 이야기를 들려드렸지요. 친구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교복을 입고 학교로 향할 때, 저는 제 힘으로 학비를 벌기 위해 차가운 세상 속에서 치열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 3년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입게 된 교복은 제게 단순한 학교 옷이 아니라, 고난을 이겨내고 얻은 '승리의 훈장'과도 같았습니다.

1. 남들보다 3년 늦게 입은 교복,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훈장

남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평범한 일상이 저에게는 피땀 어린 노력 끝에 얻은 기적이었습니다. 3년이라는 공백기 동안 저는 또래 친구들이 펜을 잡을 때 무거운 짐을 들었고, 책장을 넘길 때 세상의 파고를 넘었습니다. 비록 몸은 고됐지만, 그때 제 가슴 속에 품었던 배움에 대한 갈망은 그 무엇보다 뜨거웠습니다.

마침내 고등학교 입학식 날, 거울 앞에 서서 매만지던 그 빳빳한 교복의 감촉을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남들보다 늦었다는 부끄러움보다, 내 손으로 일궈낸 성취라는 자부심이 저를 더 당당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3년은 저에게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거친 바다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준 가장 혹독하고도 귀한 수업이었습니다.

2. '간절함'이라는 엔진으로 35년 장사 인생을 버텨내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다는 생각에 저는 인생을 두 배, 세 배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 3년의 공백기 동안 몸으로 익힌 생활력이 훗날 제가 15년 홈패션 매장과 20년 식당을 운영하며 만난 수많은 위기를 넘기게 한 든든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장사를 하다 보면 당장이라도 문을 닫고 포기하고 싶은 절망적인 순간이 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저는 '3년이나 기다려 학교에 갔던 그때 그 간절함'을 떠올리며 다시 앞치마를 질끈 동여맸습니다. 학비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던 소녀 시절에 비하면, 지금의 시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주문을 걸며 버텼습니다. 결국 장사의 성패는 기술이 아니라 '누가 끝까지 버티느냐'는 간절함의 차이라는 것을, 저는 교복을 기다리던 그 세월 속에서 이미 깨달았습니다.

3. 8남매의 일곱째가 배운 '책임감'이라는 가장 확실한 장사 밑천

북적이는 8남매 틈에서 자라며, 남들보다 늦게 배움의 길을 갔지만 그만큼 세상은 일찍 배웠습니다. 손님 한 분 한 분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은, 제가 겪었던 그 절실한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사는 단순히 물건을 주고받는 행위가 아니라 '나의 진심과 성실함'을 보여주는 신뢰의 과정입니다.

저는 교복을 기다리던 그 3년 동안, 성실함이 어떻게 기적을 만들어내는지 몸소 체험했습니다. 식당에서 고기를 썰고 이불을 팔 때도 저는 늘 그때의 초심을 잊지 않았습니다. 손님들은 제 투박한 손마디에서 그 진심을 읽어주셨고, 그것이 3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단골들을 지켜온 저만의 '장사 철학'이 되었습니다.

4. 멈추지 않는 도전, 인생의 진짜 무대는 이제부터입니다

비록 지금 가족들의 건강 문제와 삶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고등학교 3년을 기다려 결국 학교 문턱을 넘었던 것처럼 저는 지금의 시련도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35년 동안 매일 아침 매장 문을 열며 손님을 맞이했던 그 뚝심으로, 이제 블로그라는 새로운 세상에 제 인생의 기록을 남기려 합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들 하지요. 3년 늦게 시작해도 결국 해냈던 제 작은 이야기가, 지금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며 힘들어하는 분들께 작은 위로와 희망이 되길 바랍니다. 저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35년 장사 내공을 담아, 이제는 블로그를 통해 세상과 더 깊게 소통하며 제 이름 석 자를 당당히 새겨나가겠습니다.

[인생이야기] 35년 장사 인생을 버티게 한 맷집의 뿌리, 열아홉 살에 입은 교복의 추억

[인생이야기] 35년 장사 인생을 버티게 한 맷집의 뿌리, 열아홉 살에 입은 교복의 추억

안녕하세요, 8남매 중 일곱째 딸입니다. 어제는 제가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블로그에 글도 못 올리고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습니다. 35년 넘게 장사하면서 아픈 줄도 모르고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이제는 제 몸이 먼저 쉬어가라고 강한 신호를 보내나 봅니다. 하루 쉬어가니 제 글을 기다려주신 분들께 미안한 마음이 앞서네요. 병원 가서 링거 한 대 맞고 가만히 누워 수액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걸 보고 있으니, 참 묘하게도 옛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더군요. 제 인생에서 가장 간절했고, 그만큼 뜨거웠던 '열아홉 살의 봄' 이야기입니다.

1. 남들은 학교 갈 때 일터로 향했던 열여섯, 눈물로 쓴 인생의 첫 일기

중학교를 졸업했을 때 제 앞길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습니다. 8남매 중 일곱째라는 처지에 시골 살림은 늘 쪼들렸고, 새어머니와의 갈등 속에서 "고등학교에 가고 싶다"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할 금기어와 같았습니다. 동네 친구들이 새 교복을 입고 깔깔거리며 학교로 향할 때, 저는 가방 대신 작업 도구를 들고 일터로 향해야 했습니다.

공부가 너무나 하고 싶었지만, 제 설움을 들어줄 곳도, 도와달라고 손 내밀 곳도 없었습니다. 그때 어린 마음에도 입술을 피가 나도록 꽉 깨물고 다짐했습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겠다. 내 손으로 직접 벌어서 당당하게 내 발로 학교에 가리라." 그 시절의 고생은 지금 떠올려도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고 눈물이 핑 돕니다. 하지만 그 차가웠던 일터의 공기가 지금의 저를 만든 단단한 거푸집이 되었습니다.

2. 3년을 꼬박 벌어 마련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존심'

남들 학교 다닐 때 저는 3년을 꼬박 일에 매달렸습니다. 또래보다 늦게 간다는 사실이 때론 속상하고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제 목표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내 힘으로 온전한 학비를 마련하는 것. 그것이 저의 자존심이었습니다. 새엄마 눈치 보며 서러운 날도 많았고, 고된 노동에 손마디가 아려올 때도 있었지만, 한 푼 두 푼 모여가는 통장의 숫자를 보며 버텼습니다.

마침내 제 힘으로 번 돈을 들고 고등학교 입학 원서를 내던 날의 그 떨림은 35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입학 서류가 아니라, 세상을 향해 "나는 내 힘으로 일어섰다"고 외치는 제 인생의 첫 번째 승리 선언이었습니다. 열아홉, 남들은 입시를 고민할 나이에 저는 비로소 꿈에 그리던 '학생'이 되었습니다.

3. 열아홉 살의 당당한 1학년, 세 살 어린 동생들과 나눈 배움의 가치

남들보다 3년 늦게 입은 교복이었지만, 저는 누구보다 당당했습니다. 세 살 어린 동생들과 같은 교실에 앉아 공부하는 게 처음엔 조금 쑥스럽기도 했지만, 이내 그 생각은 사라졌습니다. 이 자리는 누가 거저 준 것이 아니라, 제가 3년 동안 피땀 흘려 스스로 차려낸 제 인생의 성찬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이 길었던 만큼 수업 시간 1분 1초가 보석처럼 귀했습니다. 남들이 지루해하는 교과서의 문장들이 제게는 세상 무엇보다 달콤한 지혜로 다가왔습니다. 그때 저는 배움보다 더 소중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스스로 일구어낸 삶은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자립의 정신이었습니다. 그 당당함이 있었기에 저는 열아홉 살의 1학년 생활을 제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으로 기억합니다.

4. 35년 장사의 풍파를 이겨낸 단단한 맷집의 시작점

어제 병원 침대에 누워 수액을 맞으며 다시금 확신했습니다. 그때 그 고생했던 3년의 시간이 없었다면, 15년 홈패션 매장과 20년 식당 장사의 그 모진 세월을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라고요. 남들보다 조금 늦게 가도 결국 도착한다는 것, 그리고 내 힘으로 일구면 그 무엇보다 뿌리가 깊고 단단하다는 것을 저는 열아홉에 이미 배웠습니다.

덕분에 62년 인생을 살아오면서 IMF니 코로나니 하는 숱한 풍파가 닥쳐도 '그래, 열아홉에도 내 힘으로 학교에 갔는데!' 하며 다시 앞치마를 질끈 묶고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어제 하루 못 올린 글까지 담아 두서없이 써 내려갔지만, 쉬고 나니 다시 기운이 납니다. 저처럼 지금 삶의 무게에 눌려 힘들어도 자기 길을 묵묵히 걷고 계신 모든 분을 오늘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우리 인생에 늦은 때란 없습니다. 스스로 시작하는 그 순간이 가장 찬란한 전성기입니다.

2026년 1월 26일 월요일

[인생이야기] 진짜 날짜는 몰라도 괜찮다, 오늘이 내 인생의 '진짜 생일'입니다

[인생이야기] 진짜 날짜는 몰라도 괜찮다, 오늘이 내 인생의 '진짜 생일'입니다

주민등록상으로는 오늘이 제 생일입니다. 아침부터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리고 지인들이 축하 메시지를 보내오지만, 사실 제 마음은 아주 오래전, 일곱 살 어린 소녀의 기억 속으로 달려갑니다. 남들은 축복 속에 기억되는 생일이라지만, 저에게 생일은 오랫동안 메워지지 않는 빈자리와 같았습니다.

1. 8남매 일곱째 딸의 잃어버린 날짜, 엄마의 목숨과 바꾼 생명

우리 아버지는 제 진짜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십니다.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난 저를 낳으실 때, 엄마는 너무 아파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셨다고 합니다. 온 가족이 엄마를 살리느라 정신이 없던 그 경황없는 세월 속에, 막내나 다름없던 제 생일 날짜는 아무도 챙기지 못한 채 잊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린 시절, 친구들이 생일이라고 미역국을 먹고 파티를 할 때면 제 마음 한구석은 늘 시리고 허전했습니다. "아버지, 제 생일은 언제예요?"라고 물어도 아버지는 그저 먼 산을 보며 "네 엄마가 너 낳고 죽을 뻔해서 날짜도 모른다"는 말씀만 되풀이하셨습니다. 일곱 살 어린 나이에 끝내 엄마를 여의고 새엄마 밑에서 자라며, 제 생일은 그렇게 세상에 없는 듯이 조용히 지나가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생일이라기보다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이 교차하는 날이었습니다.

2. 고단했던 35년 장사 인생과 무심했던 세월들

결혼해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자상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남편에게 생일을 챙겨달라 떼쓰는 것은 사치처럼 느껴졌습니다. 저조차 진짜 제 생일을 모르니 남에게 챙겨달라 말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생각나면 챙기고, 바쁘면 그냥 지나치기를 수차례. 15년 홈패션 매장을 운영하고 20년 식당 불 앞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살면서 제 자신을 돌볼 여유는 단 1분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아이들이 커가면서 "엄마 생일 축하해요"라며 챙겨주는 정도가 제 유일한 위안이었습니다. 35년 넘게 자영업의 풍파를 온몸으로 맞으며 살다 보니, 생일은 그저 '또 한 살 먹고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 깊은 곳에는 늘 나만을 위한 '진짜 축하'를 받고 싶은 어린 소녀의 갈망이 숨어 있었습니다.

3. 올해 찾아온 기적 같은 선물, 500만 원의 환급금과 당당한 승리

그런데 참 신기한 일입니다. 평생을 '진짜' 날짜를 모른 채 호적상 생일로 살아온 저에게, 올해는 아주 특별한 선물들이 쏟아졌습니다. 35년 넘게 거친 세상을 버텨온 저에게, 오늘 현대해상에서 보험 환급금 500만 원이 입금되었다는 기적 같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설계사인 시누이와의 해묵은 갈등으로 마음고생 하며, 당당하게 내 권리를 찾겠다고 선언했던 바로 그날, 거짓말처럼 이 돈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돈 500만 원이 아니라, 제가 그동안 참아왔던 세월에 대한 보상이자 제 자존심을 되찾은 승리의 훈장이었습니다. 게다가 오늘 처음 시작한 블로그 화면에서는 축하 풍선들이 두둥실 날아다니며 저를 반겨주었습니다. 구글이라는 똑똑한 시스템이 제 외로운 생일을 축하해 주는 것 같아 목이 메고 뭉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4. 나에게 건네는 축하, "장하게 잘 컸다, 우리 딸"

진짜 생일 날짜는 몰라도 이제는 정말 괜찮습니다. 오늘 느낀 이 기쁨과 당당함이 제 인생의 '진짜 생일 선물'이라 믿고 싶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목숨 걸고 저를 낳아주신 그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게, 저는 오늘도 이렇게 씩씩하게 제 길을 가고 있습니다. 35년 장사 인생으로 다져진 맷집과 8남매 일곱째로 자란 강인함으로 저는 이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당당한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일곱 살의 외로웠던 어린 나에게 오늘 진심을 담아 말해주고 싶습니다. "너는 참 귀하게 태어났고, 누구보다 장하게 잘 컸다. 오늘 네 생일을, 그리고 네가 되찾은 네 인생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오늘이야말로 제가 다시 태어난 진짜 생일입니다.


2026년 1월 25일 일요일

[인생이야기] 곰팡이 핀 떡보다 차가웠던 외면, 엄마 없는 일곱 살의 첫 소풍.

[인생이야기] 곰팡이 핀 떡보다 차가웠던 외면, 엄마 없는 일곱 살의 첫 소풍

어린 시절의 기억은 대부분 안개 속처럼 희미합니다. 7살에 엄마를 여의고 앞만 보고 살아온 고달픈 세월 탓인지, 기억의 페이지들은 빛바랜 사진처럼 지워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첫 소풍날의 기억만큼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슴 한구석에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아니, 차라리 잊혔으면 좋았을 만큼 시리고 아픈 기억입니다.

1. 화사한 돗자리 사이로 스며든 일곱 살의 외로움

그날은 온 동네 엄마들이 화사한 옷을 입고 정성껏 싸온 도시락을 들고 따라오던 잔칫날 같았습니다. 연두색으로 물든 들판 위로 화려한 돗자리들이 꽃처럼 깔리고, 친구들은 엄마들과 삼삼오오 무리 지어 재잘거리며 웃음꽃을 피웠습니다. 하지만 엄마 없는 8남매 중 일곱째인 저에게 그 풍경은 다른 세상 이야기였습니다.

엄마들과 모여 앉아 정답게 밥을 먹는 그 따스한 풍경이 너무나 부러워, 저는 멀찍이 서서 멍하니 그쪽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밥 한 술보다 엄마의 따뜻한 손길이 더 고팠던 그때, 제 귀에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박혔습니다. "에고, 저 집 애들 좀 봐... 엄마도 없이 소풍을 왔으니 어쩌나..." 동정 어린 그 말조차 어린 가슴에는 비수처럼 꽂혔습니다.

2. 큰엄마의 인색한 손길과 종갓집의 그늘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우리 큰엄마는 그 안쓰러운 수군거림을 듣고도 못 들은 척, 애써 고개를 돌려버리셨습니다. 언니와 저, 엄마 잃은 조카들을 한 번쯤은 챙겨주실 법도 한데, 큰엄마의 그 차가운 외면은 어린 마음을 더욱 얼어붙게 했습니다. 당시 큰집은 19가구뿐인 작은 동네에서 가장 부유한 편에 속했습니다. 종갓집이라 제사도 일 년에 열 번 넘게 지냈고, 먹을 것이 부족하던 그 시절 제삿날은 우리 남매들에게 유일한 잔칫날 같았습니다.

떡이며 과일이며 그날만큼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큰엄마는 참 인색하셨습니다. 제사 지내고 남은 떡에 파란 곰팡이가 피어 버려질지언정, 엄마 잃고 배고픈 조카들에게는 단 한 조각도 내어주지 않으셨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동정보다, 피를 나눈 친척 어른의 그 차가운 외면과 인색함이 일곱 살 제 가슴에는 지워지지 않는 시퍼런 멍으로 남았습니다.

3. 언니와 함께 울며 삼킨 그늘진 구석의 도시락

부러움과 서러움이 뒤섞인 눈으로 화려한 돗자리 쪽을 바라보던 제 손을, 누군가 홱 낚아채듯 잡아끌었습니다. 바로 우리 언니였습니다. 엄마들 틈에서 기죽어 있는 동생의 눈빛이 너무나 안쓰러워, 언니는 제가 그 행복한 풍경을 더 보지 못하도록 사람 없는 나무 그늘 구석으로 저를 데려갔습니다.

화려한 꽃들 대신 칙칙한 흙바닥에 앉아, 언니와 저는 서로를 바라보며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서러운 눈물이 섞여 들어간 도시락을 함께 먹던 그 소풍날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하지만 그 시절 엄마 없는 설움이 사무치던 그 아픔은, 역설적으로 제가 35년 넘게 자영업의 모진 풍파를 견디고 인내하게 만든 가장 단단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오늘따라 그늘진 구석에서 울고 있던 어린 저와 언니를 꼭 안아주고 싶습니다. "그 눈물이 너를 이렇게 강한 사람으로 만들었단다"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2026년 1월 24일 토요일

[인생이야기] 사라진 고향의 풍경, 상여집의 징 소리와 제주 집 앞의 붉은 황토 흙

[인생이야기] 사라진 고향의 풍경, 상여집의 징 소리와 제주 집 앞의 붉은 황토 흙

살다 보니 잊고 지내는 것이 참 많습니다. 블로그에 하나씩 내 인생 이야기를 풀다 보니 오늘은 유독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풍경 하나가 떠오르네요. 내가 태어날 때부터 그 자리에 늘 있었던 곳, 우리 동네 논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던 작고 낡은 기와집 한 채. 그게 바로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관리하며 슬픔을 나누던 ‘상여집’이었습니다.

1. 마을의 슬픔과 신명이 공존하던 신비로운 공간, 상여집

지금이야 장례 전문 인력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지만, 그 시절엔 마을 사람들이 품앗이하듯 슬픔을 함께 나눴지요. 마을의 어른이 돌아가시면 그 낡은 기와집에서 화려하면서도 묵직한 상여가 실려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단순히 상여만 보관하던 곳이 아니었습니다. 마을 제사를 지내거나 큰 굿판이 벌어질 때 쓰던 장구, 징, 꽹과리 같은 민속 악기들도 모두 그 기와집 안에 고이 모셔두었지요.

어린 우리 눈에는 그 모든 풍경이 경건하기보다 무서웠습니다. 밤이면 상여집 안에서 누군가 징을 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같아 오싹했고, 그 근처를 지날 때면 괜히 뒤를 돌아보게 되곤 했습니다. 죽음과 신명이 한 지붕 아래 머물던 그 기묘한 공간은 어린 소녀였던 제게 세상의 깊은 신비로움을 처음 가르쳐준 곳이었습니다.

2. 금줄과 붉은 황토 흙, 신성함을 지키던 엄격한 약속

마을 제사가 있는 해면 집집마다 돌아가며 ‘제주(祭主)’를 맡곤 했습니다. 그해 제주가 된 집은 대문 앞에 푸른 솔잎을 끼운 새끼줄, 즉 금줄을 치고 바닥에는 붉은 황토 흙을 군데군데 놓아두었습니다. “이곳은 지금 신성한 곳이니 부정한 사람은 발을 들이지 마라”는 마을 전체의 무언의 약속이자 엄격한 계율이었습니다.

제사가 끝날 때까지는 이웃들도 그 집 문턱을 절대 넘지 않았고, 제주 가족들도 몸가짐을 극도로 조심하며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했습니다. 7살 어린 나이에 엄마를 여의고 8남매 중 일곱째로 자라던 제게, 대문 앞의 그 붉은 흙은 범접할 수 없는 경계선 같았습니다. 혹여 부정이라도 탈까 봐 숨을 죽이며 그 앞을 지나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정성이 곧 신앙이었던 시절의 순수한 풍경이었습니다.

3. 사라진 풍경 속에 묻어둔 어린 시절의 공포와 그리움

참 묘한 일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던 그 상여집도, 대문 앞을 지키던 붉은 흙의 풍경도 어느 순간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언제 헐렸는지, 그 엄격하던 풍습이 언제 멈췄는지 도무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35년 넘게 장사하며 먹고사는 게 바빠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내 어린 시절의 공포도, 마을을 하나로 묶어주던 그 뜨거웠던 정성들도 그렇게 소리 없이 우리 곁을 떠나갔나 봅니다.

사진 한 장 남지 않은 기억이지만, 눈을 감으면 지금도 그 서늘한 기와지붕 아래서 금방이라도 징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습니다. 이제는 장례식장의 차가운 조명 아래서 기계적으로 이별을 맞이하지만, 가끔은 온 마을이 함께 울고 함께 정성을 들였던 그 상여집 앞마당이 그리워집니다.

여러분의 고향 길에도 이제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하지만 가슴 속엔 여전히 서늘하게 남아 있는 그 무섭고도 그리운 풍경이 하나씩 있으신지요? 오늘 저는 그 사라진 상여집의 문을 다시 열어, 제 인생의 잊혔던 조각 하나를 기록으로 남겨봅니다.

2026년 1월 23일 금요일

[인생이야기] 사라진 울진 염전마을의 겨울, 처마 밑 물곰과 아궁이 속 군고구마의 추억

[인생이야기] 사라진 울진 염전마을의 겨울, 처마 밑 물곰과 아궁이 속 군고구마의 추억

안녕하세요. 오늘은 이제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오직 제 마음속에만 박제된 소중한 고향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지금은 엑스포 공원이 크게 들어서며 옛 자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예전 경북 울진 수산리에는 하얀 소금기 바람이 사계절 내내 불어오던 **'염전마을'**이 있었습니다. 8남매 중 일곱째 딸로 자랐던 그곳에서의 겨울은, 비록 가난했지만 바다가 내어준 선물과 따뜻한 아랫목 덕분에 참으로 풍요로웠습니다.

1. 울진장에서 사 온 겨울 식량, 처마 밑에 걸린 물곰과 양미리

겨울철 울진 장날이 되면 아버지는 울진과 죽변의 명물인 물곰(곰치)과 양미리를 새끼줄에 엮어 한 짐 가득 사 오시곤 했습니다. 커다란 물곰은 처마 밑에 줄줄이 걸어두고 매서운 바닷바람에 꾸덕꾸덕하게 말렸습니다. 양미리 역시 수십 마리씩 엮여 우리 집의 든든한 겨울 식량이 되어주었지요.

요즘은 물곰이 워낙 귀해 '금생선'이라 불린다지만, 그때는 집집마다 처마 밑에 물곰 한두 마리 걸려 있지 않은 집이 없었습니다. 잘 마른 물곰을 내려 신김치 숭숭 썰어 넣고 가마솥에 푹 끓여 먹던 그 시원하고 칼칼한 냄새... 35년 넘게 식당 장사를 하며 수많은 음식을 만져온 저이지만, 그 시절 코끝을 스치던 고향의 맛은 그 어떤 산해진미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2. 수산리 백사장의 도루묵 알과 아궁이 속 노란 군고구마

저희 마을 뒤편은 방파제 하나 없는 너른 백사장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겨울 파도가 매섭게 몰아치고 나면 다음 날 아침, 백사장은 마법 같은 보물창고로 변해 있었지요. 거센 파도에 밀려온 물곰 알과 도루묵 알들이 모래 위를 하얗게 덮곤 했습니다. 아침 일찍 바구니를 들고 나가 모래에 섞인 알들을 주워 담아오면, 어머니는 가마솥에 물을 끓이셨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겨울밤의 백미는 바로 아궁이 속에서 익어가는 고구마였습니다. 가마솥에 알이 삶아지는 동안, 아버지는 아궁이 깊숙한 잿더미 속에 고구마를 툭툭 던져 넣어두셨지요. 8남매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삶아진 도루묵 알을 '톡톡' 터뜨려 먹다 보면, 어느새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군고구마가 익어 나왔습니다.

손을 데어가며 껍질을 까면 올라오던 그 뜨거운 김과 노란 속살... 짭짤한 바다의 알과 달콤한 고구마를 번갈아 먹으며 배를 채우던 그 시절, 우리 8남매에게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잔칫집이었습니다. 얼굴에 검은 재를 묻히고도 서로를 보며 웃던 그 따뜻한 아궁이 앞이 오늘따라 유독 그립습니다.


울진군 수산리 염전마을 백사장 전경
(사라진마을 내고향 염전백사장)
      

3. 기억 속에만 남은 나의 그리운 염전마을을 추억하며

이제 저의 고향 집터에는 거대한 엑스포 공원이 들어서고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가고 싶어도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 되었기에 그 시절의 풍경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아리고 애틋하게 다가옵니다. 흔했던 물곰과 양미리, 백사장에 지천이던 도루묵 알들, 그리고 장작불 앞에 모여 앉아 고구마를 나눠 먹던 식구들...

비록 마을의 물리적 형태는 사라졌지만, 제 가슴 속에는 여전히 수산리 염전마을의 짭조름한 소금기와 달콤한 군고구마 향기가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35년 장사 인생의 고단함 속에서도 저를 버티게 한 것은 바로 이 따뜻한 고향의 기억이었습니다. 가난했지만 바다가 있어 넉넉했고, 식구가 많아 든든했던 그 시절의 겨울이 사무치게 그리운 오늘입니다.


2026년 1월 21일 수요일

[인생이야기] 사라진 울진 염전마을의 여름, 8남매가 노 저어 떠나던 바다 원정기


[인생이야기] 사라진 울진 염전마을의 여름, 8남매가 노 저어 떠나던 바다 원정기

안녕하세요. 지난번에는 우리 고향에서 감자가루 만들던 추억을 올렸는데, 오늘은 우리 8남매의 시끌벅적했던 여름 휴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매년 여름 휴가철, 객지에 나갔던 언니들이 고향 집으로 하나둘 내려오면, 울진 수산리 염전마을 저희 집은 금세 왁자지껄한 축제 마당이 되었습니다. 그 시절 우리 자매들의 가장 큰 연중행사는 배를 타고 이웃 동네로 피서를 가는 '바다 원정길'이었습니다.

1. 19가구 마을의 유일한 보물, 노 젓는 배를 타고 떠나던 길

제가 나고 자란 수산리 염전마을은 19가구가 오순도순 모여 살던 정겨운 곳이었습니다. 지금은 엑스포 공원이 들어서서 옛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제 기억 속엔 19가구 집집마다 저녁나절 피어오르던 연기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우리 동네 앞바다는 끝없이 펼쳐진 고운 백사장이라 놀기엔 좋았지만, 따개비를 따거나 바위 틈에서 고동을 잡으며 놀려면 바위가 많은 이웃 동네로 '배'를 타고 나가야만 했습니다.

우연히 앨범을 뒤지다 발견한 사진 속에는 동네의 유일한 배가 찍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배 한 척에 온 식구가 올라타고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엔진 소리 하나 없이 오로지 오빠와 언니들이 힘차게 젓는 노 소리만 '삐걱, 삐걱' 들려오던 그 고요한 바다길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경북 울진군 수산리 염전마을의 유일했던 노 젓는 나무배 사진입니다. 35년 장사 인생의 뿌리가 된 8남매의 어린 시절, 여름 휴가철이면 온 가족이 이 배를 타고 투명한 바다를 건너 공석리, 현내리, 연지리 외갓집까지 원정을 떠나던 소중한 추억이 담겨 있습니다. 이제는 엑스포 공원이 들어서며 사라진 고향 마을의 역사와 8남매의 웃음소리를 실어 나르던 마을의 보물 같은 배를 기록한 귀한 사진입니다.
우연히 낡은 앨범을 뒤적이다 이 사진을 발견하고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사진 속에 보이는 저 투박한 나무배는 당시 우리 수산리 염전마을 19가구가 공동으로 아끼던 유일한 이동 수단이었습니다. 요즘처럼 기름으로 가는 엔진 배가 아니라, 오빠들이 땀 흘리며 직접 노를 저어야만 나아갔던 정직한 배였지요.

8남매가 옹기종기 배에 올라타면 노가 물을 젓는 '삐걱, 삐걱' 소리가 정겹게 들려왔고, 배 밑으로는 울진 바다의 투명한 속살과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훤히 들여다보였습니다. 지도에서는 사라진 고향이지만, 이 사진 속 텍스트를 따라가다 보면 제 가슴 속엔 여전히 그해 여름의 짭조름한 소금기가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2. 공석리에서 현내리까지, 투명한 바다 밑을 지나던 설렘

매년 여름, 우리의 목적지는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어느 해에는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공석 바닷가로 향했습니다. 또 어느 해에는 조금 더 멀리 현내리까지 파도를 넘어갔지요. 어렸던 저는 배를 타고 깊은 바다로 나갈 때면, 너무 투명해서 오히려 무서울 정도로 깊어 보이는 바다 밑을 내려다보며 배멀미를 견뎌내곤 했습니다.

바다 밑으로는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들이 하나하나 다 보일 정도로 물이 맑았습니다. 햇살이 바다 깊숙이 내리쬐면 모래바닥의 물결무늬까지 선명하게 보였지요. 현대식 모터배가 아닌, 사람의 힘으로 노를 저어 가던 그 느릿한 항해는 어린 제게 세상에서 가장 짜릿한 모험이었습니다.

3. 외갓집 연지리 바닷가에서의 이 시린 수박 한 조각

가장 기억에 남는 원정은 외갓집이 있는 연지리로 가던 해였습니다. 외갓집 식구들의 환대를 받으며 연지리 바닷가 바위 틈에서 따개비를 따고, 언니들과 물놀이를 하던 그 시간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었습니다. 파도가 치는 바위틈에 수박을 끈으로 묶어 담가두었다가, 이가 시릴 정도로 시원해졌을 때 쪼개 먹던 그 맛은 35년 넘게 식당을 운영해온 저로서도 잊을 수 없는 '인생의 맛'입니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배를 타고 나갔던 그 평화로운 바다와, 8남매가 한데 어우러져 웃던 그 시절이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그때는 이 행복이 영원할 줄 알았고, 우리 마을이 지도에서 사라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4. 사라진 마을, 가슴 속에만 남은 영원한 고향

이제 그 19가구가 살던 수산리 염전마을은 지도에서 영영 사라졌습니다. 공원이 들어서면서 정들었던 이웃들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우리 남매들을 귀여워해 주시던 동네 어르신들도 이제는 거의 다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고향 땅을 다시 밟아도 반겨줄 사람 하나 없는 낯선 풍경이 되었지만, 제 마음속에는 여전히 연지리 외갓집의 따뜻함과 현내리 바다의 시원함이 그대로 살아 숨 쉽고 있습니다.

장사 인생 35년, 고단한 삶의 고비마다 저를 웃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삐걱'이는 노 소리와 함께했던 여름날의 기억입니다. 여러분의 기억 속에도 이제는 사라졌지만 가슴 속엔 선명한 '여름의 한 페이지'가 있으신지요?







2026년 1월 20일 화요일

[인생 이야기]8남매 중 일곱째 딸, 아버지의 장날 데이트와 고래고기

8남매 중 일곱째 딸, 아버지의 장날 데이트와 고래고기

 여덟 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난 저의 유년 시절은 북적임 뒤에 찾아온 묘한 쓸쓸함이 함께였습니다.

 위로 언니들은 하나둘 시집을 가고, 든든했던 오빠마저 직장을 찾아 타지로 떠나버렸지요. 
결국 넓은 집에는 언니 한 명과 저, 그리고 막내 동생까지 우리 세 자매만이 남아 아버지를 모시고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빈자리가 컸던 그 시절, 아버지는 유독 일곱째인 저를 끔찍이 아끼셨습니다. 장날만 되면 아버지는 대문 밖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로 하루를 시작하셨지요.

​"야야, 장에 가자! 니 안 가면 아부지 장에 안 간다!"

집에 남은 세 자매 중에서도 유독 저를 앞세우고 장터로 향하시던 아버지. 자다가도 그 소리에 벌떡 일어나 아버지의 굵고 따뜻한 손을 잡으면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투박한 손마디의 감촉이 어머니 없는 빈자리를 채워준 제 유년 시절의 가장 큰 위로였습니다.

 고래고기 한 점과 아버지의 막걸리 한 사발

​시장에 들어서면 코끝을 자극하던 그 특유의 고래고기 삶는 냄새가 지금도 선합니다. 아버지는 단골 가게 평상에 저를 앉히시고는 아주머니에게 쌈짓돈을 꺼내며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딸내미 제일 맛있는 부위로 좀 썰어주소. 나는 막걸리 한 사발 주시고."


접시에 담긴 고소하고 담백한 고래고기 수육
요즘은 참 귀해진 고래고기입니다. 어린시절 아버지의 막걸리 안주이자, 저에게는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확인시켜 주던 특별한 음식이었습니다.

검고 매끈한 껍질과 뽀얀 속살이 어우러진 고래고기 한 점을 소금에 콕 찍어 제 입에 넣어주시고는, 아버지는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켜셨습니다.
 뽀얀 막걸리 한 잔에 고단한 농사일과 자식 여럿 키우는 무게를 잠시 내려놓으시는 듯 보였지요. 정작 고기에는 젓가락질도 몇 번 안 하시고, 제가 오물오물 씹는 모습만 흐뭇하게 바라보시며 허허 웃으시던 그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아버지의 소맷자락에 담긴 깊은 사랑

접시에 담긴 고소하고 담백한 고래고기 수육
8남매 중 일곱째인 저를 유독 아껴주셨던 아버지의 생전 모습입니다. 저에게는 세상 그 누구보다 크고 든든한 버팀목이셨지요."

집에 남겨진 언니와 동생에게는 조금 미안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몽유병으로 밤마다 밖을 헤매며 기력이 약해진 일곱째 딸을 향한 아버지의 안쓰러운 마음을 알기에, 그 순간만큼은 온전히 아버지를 독차지하며 행복을 누렸습니다.

​고기를 다 먹고 나면 기름기가 묻은 제 입술을 당신의 투박한 소맷자락으로 슥 닦아주시던 그 온기. 이제는 전국 어디 유명한 장터에 가도 그때 그 맛이 나지 않습니다. 
고래고기가 귀해진 탓도 있겠지만, 저를 가장 귀하게 여겨주시던 아버지의 따뜻한 시선과 막걸리 사발 너머의 인자한 미소가 없기 때문이겠지요.
 오늘따라 아버지가 잡아주시던 그 굵고 따뜻한 손마디가 무척이나 보고 싶어지는 저녁입니다.

[인생이야기] 35년 장사 인생에 처음 허락된 쉼표, 제주 아르떼뮤지엄 티바에서 마주한 눈물겨운 꽃차

[인생이야기] 35년 장사 인생에 처음 허락된 쉼표, 제주 아르떼뮤지엄 티바에서 마주한 눈물겨운 꽃차

주민등록상 제 생일인 오늘, 2년 전 남편의 환갑을 맞아 온 가족이 다녀왔던 제주도 여행의 사진을 다시 꺼내 봅니다. 사실 저와 남편에게 이 여행은 남들 다 가는 흔한 관광이 아니었습니다. 15년 침구 사업과 20년 요식업, 도합 3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제대로 된 여행 한 번 가보지 못하고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 부부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생애 첫 휴식'**이었기 때문입니다.

1. 단골손님 발길 돌릴까 무서워 여행 한 번 못 간 35년의 세월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참으로 무거운 단어입니다. 15년 동안 홈패션 침구 사업을 할 때는 이불 보따리를 짊어지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느라 발바닥이 부르트기 일쑤였고, 이후 20년 동안 식당을 운영하면서는 1년 365일 시뻘건 가스불 앞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남들 다 쉬는 명절이나 휴가철이 저희 같은 자영업자들에게는 가장 바쁜 대목이었기에, 우리 가족의 달력에는 '휴가'라는 글자가 적힐 틈이 없었습니다.

"가게 문 닫으면 단골손님들 헛걸음할 텐데", "하루라도 쉬면 내일 장사에 지장이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여행은커녕 가까운 나들이 한 번 마음 편히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8남매 중 일곱째 딸로 태어나 일찍 엄마를 여의고 고생하며 자란 탓인지, 저에게는 쉬는 것보다 일하는 것이 더 익숙한 삶이었습니다. 그렇게 남편과 저는 서로의 얼굴에 늘어가는 주름조차 찬찬히 들여다볼 여유 없이, 오로지 자식들 키우고 먹고사는 일에만 온 청춘을 다 바쳤습니다.

2. 남편의 환갑에야 비로소 마주한 제주도, 그리고 아르떼뮤지엄 티바

어느덧 35년이 흘러 남편이 환갑을 맞이했을 때야, 저희는 처음으로 큰맘 먹고 가게 문을 닫았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제주도 바다는 제 눈물만큼이나 푸르고 깊었습니다. 그 여행 중 방문했던 아르떼뮤지엄 티바(Tea Bar)는 제 인생에서 가장 환상적이고도 뭉클했던 순간으로 기억됩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주문한 차가 담긴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순간이었습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찻잔을 중심으로 형형색색의 예쁜 꽃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활짝 피어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디지털로 구현된 영상이었지만, 35년 평생 식당 주방에서 김치 냄새, 고기 냄새만 맡으며 살아온 저에게는 그 꽃들이 세상 그 어떤 꽃보다 향기롭고 아름답게 다가왔습니다.

그날 찻잔 위에서 피어나던 꽃들은 마치 저에게 **"그동안 참 장하게 잘 버텼다, 이제는 너도 이 꽃처럼 좀 피어나도 된다"**라고 말하며 제 거칠어진 손을 어루만져 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환상적인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우리 가족의 앞날도 이제는 이 찻잔 속 꽃처럼 고생 끝에 활짝 피어나길 간절히 소망해 보았습니다.

35년 장사하느라 처음 간 제주 여행에서 본 꽃차
35년 장사하느라 처음 간 제주 여행에서 본 꽃차

3. 가족의 웃음소리가 꽃처럼 피어난 35년 만의 보상

침구 사업 15년, 요식업 20년... 거친 세상을 버텨오느라 남편과 이런 여유를 누려본 게 참으로 오랜만 아니, 사실상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날만큼은 주문 들어온 음식을 서두르지 않아도 되었고, 손님들의 요구에 허리 굽히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아내이자 엄마로서, 남편과 마주 앉아 꽃차 한 잔을 나누는 그 평범한 일이 35년 만에 처음 느껴보는 가장 큰 호사였습니다.

지금은 다시 장사 현장으로 돌아와 앞치마를 두르고 있지만, 2년 전 그날 마셨던 따뜻한 차의 향기와 가족들의 해맑은 웃음소리는 여전히 제 가슴 한구석에 선명한 훈장처럼 남아 있습니다. 삶이 고단하고 장사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저는 제주도 찻잔 위에 피어나던 그 찬란한 꽃들을 떠올립니다.

비록 진짜 제 생일 날짜는 몰라 호적상 생일로 오늘을 보내고 있지만, 제주도에서 마주한 그 꽃차처럼 제 남은 인생도 늘 아름답게 피어나길 빌어봅니다. 35년이라는 긴 터널을 묵묵히 함께 걸어와 준 남편에게, 그리고 장한 우리 아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오늘 제 이야기가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모든 자영업자분께 따뜻한 꽃차 한 잔 같은 위로가 되길 소망합니다.



[인생이야기] 딸 많은 집 일곱째 딸, 아버지의 '욕 한마디 없는' 밥상머리 교육이 준 선물

 딸 많은 집 일곱째 딸, 아버지의 '욕 한마디 없는' 밥상머리 교육이 준 선물

​어제 정월대보름 환한 달빛을 보며 아버지 생각에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대보름 달빛만큼이나 인자했던 아버지의 얼굴이 유독 간절하게 떠오르는 밤입니다. 
살아계셨다면 올해로 102세, 소띠이신 우리 아버지. 73세라는 연세에 조금 일찍 곁을 떠나셨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아버지가 남겨주신 삶의 가르침은 제 인생의 가장 큰 자산이 되었습니다.

​풍파 속에서도 잃지 않은 성품의 품격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탄광 징용의 어둠 속에서도 운 좋게 살아남으셨고, 뒤이어 터진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기적처럼 돌아오신 분입니다. 
그 모진 세월과 생사의 고비를 온몸으로 겪으셨으니 얼마나 마음속에 울화와 고단함이 많으셨을까요.

​하지만 아버지는 집에서 단 한 번도 화를 내거나 매를 드시는 법이 없었습니다. 
특히 딸이 많은 우리 집에서, 엄마 없이 자라는 딸들이 기죽을까 봐 혹은 어디 가서 손가락질받을까 봐 아버지는 평생 우리에게 욕 한마디 하지 않으셨습니다. 
7살에 엄마를 여의고 적적해진 집안에서, 우리 세 자매를 늘 칭찬해 주시고 인자한 미소로 감싸주셨던 아버지는 저에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우주였습니다.

​지겹도록 들었던 잔소리 속에 담긴 '지독한 사랑'

​그런 자상한 아버지가 밥상머리에서만큼은 조용히, 하지만 지겹도록 반복해서 가르치신 '예절'이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어른들 길 가시는데 그 앞을 가로질러 가지 마라. 옆으로 비켜 서서 기다렸다가 인사드리고 조용히 다녀라."
"어디 가서든 남의 눈에 어긋나는 짓 하지 말고, 말 한마디도 정갈하게 해라."

​어린 시절에는 그 말씀이 왜 그리도 듣기 싫은 잔소리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야 알겠습니다. 
아버지가 그토록 예절을 강조하셨던 건, 엄마 없는 자식들이라고 남들에게 얕보이지 않게 하시려던 아버지만의 '지독한 사랑'이었다는 것을요.
​**"내가 내 자식을 귀하게 대접해야 남들도 내 자식을 업신여기지 못한다"**던 그 말씀.
 아버지는 딸 많은 집 자식들이 욕 듣지 않게 하시려고, 스스로 화를 누르며 가장 인자한 모습으로 우리를 귀하게 대접해 주셨던 것입니다.

​가정교육의 힘으로 버틴 35년 자영업

​죽음의 문턱을 여러 번 넘으면서도 인간다운 품위를 잃지 않으셨던 나의 아버지. 그 시절 아버지가 입혀주신 '예의'라는 갑옷 덕분에, 저는 훗날 35년 자영업의 모진 풍파를 다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손님을 대할 때나 사람을 대할 때, 아버지의 가르침은 제 몸에 배어 저를 지켜주는 가장 단단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오늘따라 밥상 맞은편에서 따뜻하게 제 이름을 불러주시며 "사람은 예의가 바라야 한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그 손길이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아버지가 지겹도록 들려주신 그 잔소리가, 지금의 저를 만든 가장 큰 축복이었음을 이제야 고백합니다.

[인생이야기]은빛 멸치 떼의 합창, 울진 19가구 작은 마을의 후리잡이와 아버지의 칭찬


[인생 이야기]​은빛 멸치 떼의 합창, 울진 19가구 작은 마을의 후리잡이와 아버지의 칭찬

​제가 자란 고향은 19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소박한 마을이었습니다. 산 하나 없이 뒤로는 푸른 동해바다가, 앞으로는 너른 들판이 펼쳐진 곳이었죠. 방파제도 없이 끝없이 이어진 고운 모래사장은 우리 8남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넓은 놀이터였습니다

​온 동네의 축제, '후리멸치잡이'를 아시나요?

​반농반어촌이었던 우리 마을은 봄과 가을이면 바다가 주는 특별한 선물로 들썩였습니다. 
바로 **'후리멸치잡이'**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후리'란 긴 그물을 바다에 둘러친 뒤 여러 사람이 양쪽에서 끌어당겨 물고기를 잡는 전통 어법입니다.

​당시 마을에는 배가 딱 세 척뿐이었는데, 모두 저희 큰아버지 소유였지요.
 멸치 떼가 들어오는 신호가 떨어지면 우리 아버지가 주인공으로 나서셨습니다.
 아버지는 바다 위 윤슬의 움직임만 보고도 멸치 떼의 길목을 귀신같이 읽어내는 베테랑이셨고, 아버지가 지휘를 시작하면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한마음으로 그물을 당겼습니다.

​그물 끝이 백사장에 닿을 때쯤, 은빛 멸치들이 '타다타닥' 소리를 내며 모래 위로 튀어 오르던 그 장관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갓 잡아 올린 멸치는 마을 사람들이 공평하게 나누어 가졌고, 커다란 가마솥에 바닷물을 길어와 푹 삶아 말려 일 년 양식으로 삼거나 장터에 내다 팔기도 했습니다.

​여덟 살 '억척이'를 만든 아버지의 숭어회

​저는 8남매 중 일곱째였지만,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일찍 철이 든 **'억척이'**였습니다. 새어머니는 몸이 약하셨기에 집안의 궂은일은 자연스럽게 제 몫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저를 유독 든든해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초망으로 싱싱한 숭어를 잡아오시는 날이면 늘 저를 찾으셨죠.
"숭어회는 새엄마보다 우리 일곱째가 썰어야 제맛이 난다!"
어린 나이에 무거운 칼을 들고 생선을 다듬는 게 고단할 법도 했지만, 저를 믿어주시는 아버지의 그 흐뭇한 칭찬 한마디면 어깨가 으쓱해져서 신나게 회를 치곤 했습니다.

​고단함 속에 피어난 삶의 근육

​지금 돌이켜보면, 일찍 엄마를 여읜 딸이 일찍 철든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얼마나 짠하셨을까요. 아버지의 그 인정 어린 칭찬은 어린 제 마음속에 **'살아낼 용기'**를 심어주셨던 것 같습니다.
​모래사장에서 그물을 당기고 생선을 손질하며 익힌 **'삶의 근육'**이 있었기에, 훗날 35년 자영업의 모진 풍풍파 속에서도 저는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인생의 파도를 넘게 해준 소중한 유년의 기억이 있으신가요?

멸치와 숭어의 효능

함께 알면 좋은 상식: 우리 가족 건강 지켜준 멸치와 숭어
​아버지가 잡아오신 은빛 멸치는 단순한 양식이 아니었습니다. 멸치는 '바다의 우유'라고 불릴 만큼 칼슘이 풍부해, 자칫 영양이 부족할 수 있었던 우리 8남매의 뼈를 튼튼하게 해주었지요. 특히 갓 잡은 멸치를 바닷물에 삶아 말리면 그 짭조름한 풍미가 일품입니다.
​또한, 제가 직접 회를 쳤던 숭어는 겨울부터 봄까지가 제철인데, 단백질이 풍부하고 소화가 잘 되어 기력 회복에 그만입니다. 아버지가 왜 하필 저에게 숭어회를 맡기셨는지, 이제야 그 깊은 속내를 알 것 같습니다. 제 손맛이 더해진 보양식을 가족들에게 먹이고 싶으셨던 아버지의 마음이었겠지요.


​다음 편에는 겨울철 농한기, 집집마다 가마니 짜는 기계 소리가 정겹던 '가마니 부업'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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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야기] 지도로는 찾을 수 없는 나의 낙원, 염전 마을의 추억

지도로는 찾을 수 없는 나의 낙원, 염전 마을의 추억

​우리 동네는 참으로 특별한 지형을 가진 곳이었습니다. 
뒤로는 푸른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앞에는 끝없는 들판이 황금빛으로 물들었으며, 마을 양옆으로는 두 줄기 강이 포근하게 감싸 안고 흐르던 곳. 그 천혜의 자연 속에 딱 열아홉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어른들은 늘 "이곳이 예전엔 다 하얀 소금이 피던 염전이었다"고 말씀하시곤 했죠. 
비록 제가 자랄 땐 염전 일은 멈춘 뒤였지만, 마을 곳곳에 남은 소금기의 흔적은 우리 8남매에게 그 어떤 놀이공원보다 신비로운 놀이터가 되어주었습니다. 
땅을 파면 짭조름한 냄새가 날 것만 같던 그 시절의 흙내음이 아직도 코끝에 선합니다.

​가난했지만 순박했던 열아홉 집의 정(情)

​우리 마을은 바다와 땅을 동시에 터전 삼은 '반농반어촌'이었지만, 대부분의 이웃은 정직하게 땅을 일구는 농사에 의존해 살았습니다. 8남매나 되는 우리 집도, 다른 이웃들도 참 가난한 시절이었지요. 하지만 그 시절 사람들은 참으로 순박했습니다.

​내 것 네 것 없이 옆집 숟가락 개수까지 다 알고 지내던 열아홉 가구. 비록 끼니 걱정을 해야 할 만큼 가난한 형편이었어도, 이웃끼리 감자 한 알, 옥수수 한 자루라도 생기면 꼭 나눠 먹었습니다. 
척박한 땅 위에서도 서로의 시린 손을 맞잡아주며 보듬으며 살았던 그 시절의 정은, 35년 동안 장사를 하며 수많은 손님을 치러온 지금의 저에게도 가장 소중한 삶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언니들이 떠난 자리를 채워준 동네 친구들

​8남매 중 일곱째였던 제게 집안은 늘 북적거리는 시장통 같았습니다. 
집안 어디를 가도 사람 온기가 가득했죠. 하지만 제가 철이 들 무렵, 나이 차가 많던 큰언니들은 하나둘 시집을 가고 든든했던 오빠들도 일자리를 찾아 타지로 떠나갔습니다.

 집안의 빈자리가 커질수록 제 마음 한구석도 쓸쓸함으로 채워졌습니다.
​그 허전함을 채워준 건 대문 밖 동네 친구들과 언니, 오빠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만나면 늘 손에 낫과 갈퀴를 들고 자연으로 향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놀이 기구가 따로 필요 없었습니다. 산과 들, 바다가 모두 우리의 장난감이었고 일터였습니다.

​소 먹이고 '갈비' 긁던 그 시절의 우정

​우리에겐 일이 곧 놀이였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가방을 던져두고 소를 끌고 들판으로 나가 싱싱한 꼴을 베었습니다. 
찬 바람 부는 겨울이면 산에 올라 마른 솔잎인 **'갈비'**를 긁어 모았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갈비'라고 하면 먹는 고기인 줄 알겠지만, 저희 세대에게 갈비는 추운 겨울 방구석을 데워주던 귀한 땔감이었습니다.
​"순이야, 소 먹이러 가자!" 담장 너머로 들려오던 친구의 목소리에 낫 한 자루 들고 뛰어나가던 그 시절. 손끝은 시리고 발가락은 얼어 감각이 없었어도, 친구들과 깔깔대며 갈비를 긁어 모으다 보면 추운 줄도 몰랐습니다.
 우리 동네 염전 마을은 산이 없어서 지금의 엑스포공원 근처 솔밭까지 원정을 가기도 했죠. 긁어모은 갈비를 가져오기 좋게 사각으로 꽉꽉 뭉치는 일은 마치 커다란 선물을 포장하는 것처럼 재미있었습니다.

​땔감 한 뭉치에 담긴 부모님을 향한 마음

​소들이 한가로이 풀 뜯는 소리와 우리의 웃음소리가 어우러지던 그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산에서 긁어온 갈비 한 뭉치를 지게에 지고 돌아올 때의 그 뿌듯함이란! 그것으로 불을 지펴 따뜻해진 방에서 아버지가 편히 쉬실 생각을 하면 어린 마음에도 참 기뻤습니다.

​35년 동안 식당과 홈패션 사업을 하며 바쁘게 달려온 지금, 문득문득 그때의 그 갈비 냄새와 솔바람 소리가 그립습니다.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부자였던 그 시절, 우리는 자연 속에서 인생을 배우고 우정을 쌓았습니다. 
여러분도 어릴 적 부모님 일손을 돕던 특별한 기억이 있으신가요? 혹은 여러분만의 비밀스러운 '낙원' 같은 장소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인생 이야기]울진 왕피천의 추억, 아버지의 초망과 8남매를 키운 숭어 이야기

울진 왕피천의 추억, 아버지의 초망과 8남매를 키운 숭어 이야기

​경상북도 울진, 한쪽으로는 왕피천이 흐르고 또 다른 쪽으로는 남대천이 굽이쳐 바다와 몸을 섞는 곳.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이 신비로운 길목은 제 고향이자, 우리 8남매의 유년 시절이 고스란히 담긴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인생이 담긴 수제 그물, '초망'

​저희 집은 10마지기 남짓한 적은 논으로 여덟 자식을 건사해야 했습니다. 농사만으로는 벅찼기에 아버지는 농사꾼이자 베테랑 어부로 사셔야 했죠. 아버지에게 **'초망(투망)'**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도구이자, 고단한 삶을 달래는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물을 직접 만드시는 장인이셨습니다. 그물 코를 하나하나 잡는 섬세한 작업이 이어질 때면, 아버지의 입가에서는 늘 나지막한 판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한 코 한 코 소리 가락을 얹어 짜 내려간 그물은 아버지의 인생 그 자체였습니다.

​특히 그물 아래 다는 **'납'**을 만들 때면 집안엔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습니다. 아버지가 불을 피워 납을 녹이실 때면, 저는 옆에서 부지런히 심부름을 하며 거들곤 했습니다. 뜨겁게 녹아내린 납이 틀에 부어져 묵직한 무게가 될 때마다, 우리 8남매를 지탱하는 아버지의 사랑도 그렇게 단단해졌을 것입니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 풍요로운 어장

​매일 새벽 4시, 아버지는 정성껏 만든 초망을 메고 어김없이 바다로 향하셨습니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역(汽水域) 특유의 환경 덕분에 아버지의 그물에는 늘 생명력이 넘쳤습니다'

​숭어: 힘차게 요동치며 올라오던 기수역의 대표 어종
• ​전어: 가을이면 고소한 냄새로 장터를 유혹하던 생선
•황어: 강물과 바닷물을 오가며 우리 가족의 단백질이 되어준 고기
​이 세 종류의 물고기만으로도 우리 가족의 식탁은 풍성했고, 고기를 보는 안목이 탁월하셨던 아버지의 어깨는 늘 당당하셨습니다.

생선 다라이를 머​생리에 이고 걷던 등굣길

​고기가 유난히 많이 잡히는 날이면, 새엄마와 저는 싱싱한 생선이 가득 담긴 커다란 **'다라이(함지박)'**를 머리에 이고 먼 장터까지 걸어갔습니다. 어린 내 목을 짓누르던 그 묵직한 무게를 견디며 생선을 다 팔고 나서야 저는 학교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교실에 앉아 있으면 손끝에 남은 생선 비린내가 부끄러울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것은 우리 가족이 치열하게 살아낸 훈장이자 긍지였습니다.

오늘따라 왕피천의 윤슬 위로 그물을 힘껏 던지시던 아버지의 투박한 손마디와, 귓가에 맴도는 판소리 한 자락이 사무치게 그리워집니다.
​다음 편에는 "후리"로 멸치를 잡던 활기찬 바다 풍경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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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야기] 사라진 고향 집터, 보따리 하나 들고 온 새엄마와 아버지의 지극정성


사라진 고향 집터, 보따리 하나 들고 온 새엄마와 아버지의 지극정성

​산 하나 없이 평평한 들판 끝, 동해 바다가 시작되는 그 길목에 우리 집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공원이 조성되어 옛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그곳은 우리 여덟 남매와 자상하셨던 아버지, 그리고 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우리 집에 들어온 새엄마의 사연이 얽혀 있는 곳입니다.

​소박맞고 들어온 여인과 아버지의 아픈 다짐

​우리 새엄마는 아이를 못 낳는다는 이유로 시댁에서 모질게 소박을 맞고 쫓겨나 갈 곳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 새엄마를 아버지가 거두어 주셨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친엄마를 병으로 먼저 떠나보낸 깊은 상처를 안고 사셨던 분입니다.
7살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우리 자식들도 가여웠지만, 아버지는 당신 곁의 소중한 사람이 또다시 병으로 떠나가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하셨습니다.

​"또 죽을까 봐 겁나서..." 산과 들을 누빈 아버지의 약초

​새엄마는 늘 '내 몸은 내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병원을 시장 구경 가듯 하셨고, 사춘기였던 우리 세 자매는 그런 새엄마의 약봉지가 참으로 야속하고 서러웠습니다.
아버지가 고생해서 번 돈이 보약으로 들어가는 게 못마땅해 원망도 참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야 아버지의 속내를 알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새엄마한테 정말 지극정성이셨습니다. 몸에 좋다는 소문만 들리면 산으로 들로 다니며 직접 약초를 캐다 나르셨지요.
아버지는 당신의 아내를 또다시 병으로 잃을까 봐, 그게 무섭고 겁이 나서 그렇게 약초를 캐 오셨던 겁니다.
새엄마의 유별난 건강 관리 뒤에는, 아내를 지키고자 했던 아버지의 눈물겨운 정성이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습니다.

​자식 없는 여자의 불안함과 아버지의 큰 사랑

​새엄마가 약봉지에 집착했던 것도 어쩌면 자식 없는 서러움 속에 늙어서 버려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겠지요.
아버지는 그 불안함까지 다 안아주셨던 겁니다.
우리 딸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새엄마에게는 안쓰러운 마음을 품고 그 긴 세월을 버티셨을 아버지. 두 마음 사이에서 침묵하며 약초를 캐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공원이 된 집터에 남은 깨달음

​이제 우리 집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 들판 끝자락을 생각하면 이제는 서러움보다 아버지의 깊은 사랑이 먼저 떠오릅니다.
사춘기 소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아버지의 그 절박했던 사랑을, 이제 환갑이 넘은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온전히 마주하게 됩니다.

​여러분 중에도 혹시 저처럼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부모님의 깊은 속마음을 깨닫고 눈물지으신 분이 계시는지요?

[인생이야기] 장구 치던 아버지와 지신밟기의 추억, 정월대보름의 그 신명 나던 가락

[인생이야기] 장구 치던 아버지와 지신밟기의 추억, 정월대보름의 그 신명 나던 가락

안녕하세요. 8남매 중 일곱째, 오늘도 인생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일곱째 딸입니다. 어제 예고해 드린 대로, 오늘은 제 어린 시절 기억 속에서 가장 시끌벅적하고 활기찼던 **'정월대보름'**과 '지신밟기' 이야기를 꺼내 보려 합니다.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은 먼 옛날의 기억이지만, 제 눈앞에는 장구 치시던 아버지의 땀방울이 지금도 선명하게 보입니다.

1. 8남매 식구들의 소란스러운 오곡밥 아침

요즘은 대보름이라고 해도 조용히 오곡밥 해 먹고 지나가는 정도지만, 제가 어릴 적 8남매와 함께 살던 고향 마을의 대보름은 명절만큼이나 큰 축제였습니다. 아침 일찍 눈을 뜨면 어머니가 정성껏 지으신 오곡밥과 아홉 가지 나물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했습니다.

식구 많은 8남매 집안이라 오곡밥 양도 어마어마한 가마솥 가득이었고, 우리는 부럼을 깨물며 "일 년 내내 무사태평하게 해주세요"라고 소리 높여 빌곤 했습니다. "내 더위 사 가라!"며 서로 더위를 팔고, 오곡밥을 누가 더 많이 먹나 아웅다웅하던 그 소란함... 7살 어린 저에게 그 소란함은 가난을 잊게 하는 따스한 온기였습니다.

"비록 사진은 없지만, 그때 머리 맞대고 밥을 먹던 형제들의 얼굴과 고소한 나물 냄새는 제 가슴 속에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2. 풍물패 대장이셨던 우리 아버지, 장구 소리에 온 마을이 들썩이고

하지만 대보름의 진짜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마을 전체를 뒤흔들던 **'지신밟기'**였습니다. 저 멀리서 꽹과리, 징, 장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면 우리 8남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문 밖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특히 저희 집 마당이 유독 떠들썩했던 아주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저희 아버지가 그 풍물패의 대장이셨거든요!

흰 두루마기를 정갈하게 차려입으시고 장구를 어깨에 메신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참 일품이었습니다. 장구채를 휘두르며 신명 나게 가락을 타실 때면 온 동네 사람들이 넋을 잃고 구경하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뽑아내시던 타령 한 자락에 마당의 흙먼지가 일어나고, 동네 사람들의 어깨춤이 덩실덩실 절로 나던 그 흥겨운 풍경...

요즘도 가끔 TV에서 장사익 님이 노래하시는 모습을 볼 때면, 그 깊은 목소리와 애절한 가락에서 장구 치시던 저희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여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곤 합니다. 7살 어린 딸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온 세상을 들썩이게 하던 최고의 예술가였습니다.

3. '다라이' 가득 담아온 이웃의 정, 보름밥 비빔밥의 추억

대보름의 축제는 밤이 되어도 끝날 줄 몰랐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지면 우리 동네 아이들은 커다란 다라이(양대야)를 머리에 이고 집집마다 돌아다녔습니다. "보름밥 좀 주세요!" 외치며 얻어온 찰진 오곡밥과 갖가지 나물들을 다라이에 한데 넣고 쓱쓱 비벼 먹던 그 맛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숟가락 하나씩 들고 달빛 아래 둘러앉아 밥을 나눠 먹으며 뭐가 그리 즐거운지 밤새 깔깔거리고 놀던 그 시절... 지금 생각해보면 그 지신밟기와 나눠 먹던 밥 한 그릇은 단순히 노는 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던 따뜻한 품앗이 마음이었습니다.

살면서 35년 자영업의 길에서 마주한 수많은 고비와 시련 속에서도 제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그때 아버지가 마당을 꽝꽝 밟아주던 그 힘찬 장구 소리와 친구들과 나누어 먹은 든든한 밥 한 끼의 기운이 제 몸속에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생이야기] 볏짚 향 가득한 겨울, 지붕을 잇고 가마니를 엮던 아버지의 손

[인생이야기] 볏짚 향 가득한 겨울, 지붕을 잇고 가마니를 엮던 아버지의 손

가을 추수가 끝나면 시골의 겨울은 집집마다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습니다. 8남매 중 일곱째인 저의 기억 속 겨울은, 찬 바람이 부는 계절이 아니라 온 동네가 하나 되어 움직이던 뜨겁고 활기찬 풍경으로 남아 있습니다. 1970년대, 가난했지만 "함께였기에 견딜 수 있었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 봅니다.

1. 서로의 비바람을 막아주던 '지붕 잇기 품앗이'

추수가 끝나면 마을의 가장 큰 숙제는 우리 집 지붕에 새 옷을 입히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초가집 지붕 잇기는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거대한 작업이었지요. 그래서 온 동네 사람들이 돌아가며 **'품앗이'**를 했습니다. 오늘은 우리 집, 내일은 앞집... 어른들이 지붕 위에 올라가 삭은 이엉을 걷어내고 노란 새 이엉을 얹을 때면, 마을은 온통 고소한 볏짚 냄새로 가득 찼습니다.

마당에서는 아낙들이 정성껏 준비한 새참을 나누며 웃음꽃이 피어났습니다. "올해 지붕도 든든하게 올라갔네!" 하며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던 풍경. 남의 집 일을 내 집 일처럼 돌봐주며 서로가 서로의 비바람을 막아주던 그 따뜻한 공동체 의식이 지금의 각박한 세상에서는 참으로 그립습니다.

2. 손바닥이 발갛게 익어가는 '새끼 꼬기'의 인내

지붕을 올리고 남은 볏짚들은 버릴 것이 하나 없었습니다. 그다음 순서는 가마니를 짤 바탕이 되는 새끼줄을 꼬는 일이었습니다. 거친 볏짚을 한 움큼 집어 손바닥 사이에 넣고 '슥슥' 비비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손바닥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따끔거렸습니다.

기계로 돌리는 작업도 있었지만, 세밀한 부분은 여전히 투박한 손바닥의 힘을 빌려야 했습니다. 어린 저는 그 따끔거림이 싫어 투정 부리기도 했지만, 그 고통을 견디며 한 줄 한 줄 단단하게 꼰 줄이 있어야만 무거운 곡식을 든든히 버티는 가마니가 될 수 있었습니다. 35년 장사 인생을 버텨온 제 인내심도 어쩌면 그때 그 발갛게 달아오른 손바닥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붕을 잇고 남은 볏짚으로 가마니를 짜기 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단단한 새끼줄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일일이 손바닥으로 비벼 꼬느라 손바닥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진물이 나기도 했지만, 우리 집에는 이 귀한 새끼 꼬는 기계가 있었습니다.

기계가 돌아가며 볏짚을 빨아들여 매끈하고 탄탄한 새끼줄을 뽑아낼 때면, 어린 마음에도 참 신기하고 든든했습니다. 이 기계 덕분에 우리 아버지는 조금 더 빠르게, 조금 더 많은 새끼줄을 준비하실 수 있었지요. 35년 장사 인생을 돌아보니, 이 기계처럼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며 줄을 뽑아내던 그 성실함이 지금의 저를 만든 뿌리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3. 집안을 울리던 가마니 기계와 아버지의 부지런함

새끼줄이 충분히 준비되면 드디어 거대한 가마니 기계가 마루에 자리를 잡습니다. 7살 꼬마의 눈에 그 기계는 집안을 꽉 채울 만큼 거대한 성벽처럼 보였습니다. 아버지가 바디를 '덜컹덜컹' 치실 때마다 온 집안에 진동이 울려 퍼졌고, 그 일정한 리듬에 맞춰 가마니가 한 줄씩 촘촘하게 엮여 나갔습니다.

반농반어촌이었던 우리 마을에서 가마니는 단순한 자급자족을 넘어 소중한 부업거리였습니다. 부지런하셨던 아버지는 겨울내내 쉬지 않고 가마니를 짜서 장터에 내다 파셨습니다. 식구 많은 8남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찬 바람 부는 마루에서 밤새 가마니를 짜던 아버지의 뒷모습... 가난하던 시절이었지만 아버지가 짜 올린 그 가마니에는 우리 가족의 겨울을 지켜준 책임감과 사랑이 담겨 있었습니다.



새끼줄이 준비되면 드디어 안방이나 마루 한편을 꽉 차지하던 가마니 짜기 기계가 가동되었습니다. 7살 꼬마였던 제 눈에는 성벽처럼 거대해 보였던 기계입니다. 아버지가 바디를 '덜컹덜컹' 치시며 박자를 맞추실 때마다, 볏짚들이 촘촘하게 엮여 든든한 가마니로 변해갔습니다.
아버지는 겨울내내 이 기계 소리와 함께 밤을 지새우셨습니다. 반농반어촌이었던 울진 수산리에서 이 가마니는 우리 8남매의 생계를 이어주던 소중한 부업이었습니다. 사진 속 투박한 기계의 몸체마다 아버지의 고단함과 자식 사랑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것 같아, 지금 다시 봐도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집니다.

4. 인생이라는 지붕을 함께 이어가는 품앗이

인생도 어린 시절의 품앗이와 참 닮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도,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손을 보태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5년 침구 사업과 20년 요식업을 거치며 저 역시 수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고, 이제는 제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차례라고 믿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가 서로의 지붕을 이어주었듯, 저 또한 이 블로그에 제 삶의 아픔과 35년의 노하우를 나누며 누군가의 마음 지붕을 잇는 '품앗이꾼'이 되고 싶습니다. 비록 지금의 제 처지가 고단한 겨울 같을지라도, 아버지가 그러하셨듯 다시 정성껏 인생의 가마니를 엮어보려 합니다. 제 이야기가 1970년대를 기억하는 분들께는 따뜻한 향수가, 젊은 세대에게는 끈기 있는 삶의 지혜가 되길 소망합니다.




사라진 나의 고향, 비 내리는 들판 끝에서 마주한 '인생 첫 전등불'

지금의 울진 엑스포공원이 들어선 그 자리, 예전엔 19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작은 바닷가 마을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지도가 바뀌었지만, 제 머릿속에는 여전히 보석처럼 박혀 있는 풍경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동네는 참으로 귀한 곳에 있었습니다. 뒤로는 푸른 동해 바다가 넘실거리고, 양옆으로는 남대천과 왕피천이라는 두 물줄기가 휘감아 흐르던 곳이었지요. 
물길이 만나 바다로 향하는 그 길목에 우리 19가구의 삶이 있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3~4학년쯤 되었을 때의 일로 기억합니다. 
추수가 막 끝나 텅 빈 들판에 겨울 초입의 서늘한 기운이 내려앉고, 부슬부슬 겨울비가 내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고모님 댁에 심부름을 갔다가 돌아오던 길이었는데, 읍내에서 버스를 내려 마을까지 들어가는 길은 유난히도 멀고 캄캄했습니다.

​그 시절 우리 동네는 해가 지면 그야말로 암흑천지였습니다. 
전기가 들어오기전 집집마다 해가지면 호롱불을 준비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들판을 가로질러 가려면 무섭기도 하고 발밑도 조심스러웠지요. 
그런데 그날은 달랐습니다. 읍내에서 내려 저 멀리 들판 끝, 우리 마을이 있는 곳을 바라본 순간 저는 그만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습니다.
​"아... 세상에 저게 뭐지?"

​어제까지만 해도 칠흑같이 어두웠던 마을이었는데, 저 멀리 바닷가 마을 집집마다 환한 보석을 박아놓은 듯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 마을에 전기가 처음 들어온 역사적인 날이었던 것입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번지는 그 전등불의 환한 빛은, 어린 제 눈에 너무나도 신비롭고, 경이로웠습니다.

 그 불빛은 단순히 전기가 들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8남매 형제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을 우리 집, 따뜻한 온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안도의 신호였습니다.

​비에 젖어 덜덜 떨리던 몸도 잊은 채, 저는 그 환한 불빛을 향해 한참을 넋을 잃고 서 있었습니다.   
와 !  세상에  저게뭐지 ! 전등불이 켜진 집안 풍경은 어떨까, 언니 오빠들은 얼마나 좋아하고 있을까 상상하며 빗속을 달려 집으로 향하던 그 설렘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전기가 들어오고 그후의 재밌는 일들도 많았습니다.

다음에는  동네 유일하게 TV가  있던 집
저녁이되면  드라마 보려고 언니들과 동네친구들이 모여서  마당에 멍석피고 둘러앉아 숨죽이고 티브보던 에피소드들  들려드릴게요.



아버지가 새벽을 여시던 그 바다에서 만난 '은빛 숭어'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꿈을 꾸어도 금방 잊히고, 꿈 자체를 잘 꾸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젯밤, 자다 깨서도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생생한 꿈을 하나 꾸었습니다.
        망양정에서 내려다본 고향앞바다

​꿈속의 나는 아주 익숙한 고향 바닷가에 서 있었습니다.
 그곳은 제가 아주 어릴 적, 아버지가 매일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초망을 던지시던 바로 그 장소입니다. 
8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해 아버지가 온몸으로 새벽 파도와 맞서던, 눈물겹고도 든든했던 삶의 현장이었지요.

​그 새벽의 바다에서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밖으로 튀어나오더군요.
 주변 사람들은 정신없이 물고기를 통에 쓸어 담는데, 저도 한 마리를 잡으려 애를 썼습니다. 
가시에 찔리고 미끄러지며 겨우 한 마리를 붙들고 있을 때, 제 눈앞에 눈부신 '은빛 숭어'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잡고 보니 어찌나 맑고 신비롭던지... 그 순간, 도저히 제 욕심으로 가둬둘 수가 없더군요. "가서 마음껏 헤엄치렴" 하는 마음으로 다시 바다에 놓아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은빛 숭어는 기다렸다는 듯 다른 물고기들과 함께 푸른 바다 속으로 힘차게 헤엄쳐 들어갔습니다.

​잠에서 깨어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그동안 62년을  살아오면서  무언가를 움켜쥐려고만 하며 치열하게 살아온 제 삶이 떠올랐습니다. 
어쩌면 아버지가 꿈을 통해 제게 응원을 보내신 게 아닐까요?

​"얘야, 그동안 참 고생 많았다. 이제는 너무 움켜쥐려 애쓰지 않아도 된단다. 네가 가진 귀한 마음과 경험들을 이 넓은 바다에 풀어놓거라." 하고 말이죠.

이제 저는 이곳 블로그라는 새로운 바다에 제 인생의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놓으려 합니다. 
아버지가 새벽 4시에 그물을 던지셨던 그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저도 매일매일 삶의 귀한 조각들을 정성껏 길어 올리겠습니다.



[인생이야기] 마루 끝 아버지의 한숨, 자식과 아내 사이에서 길을 잃다

 마루 끝 아버지의 한숨, 자식과 아내 사이에서 길을 잃다

​여덟 남매로 북적거리던 우리 집도 세월의 흐름 앞에서는 고요해졌습니다.

엄마의 빈자리를 묵묵히 채워주며 동생들을 돌보던 큰언니들이 하나둘 시집을 가고, 집안의 기둥 같던 오빠마저 외지로 직장을 찾아 떠나자 넓던 집안에는 적막함이 찾아왔습니다. 

결국 학교에 다니던 저와 바로 위 언니, 그리고 아직 어린 막내까지 우리 세 자매만이 남아 텅 빈 집안 공기를 견뎌야 했습니다. 북적거림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묘한 쓸쓸함과 앞날에 대한 불안함이었습니다.

​새엄마와의 서먹한 동거, 사춘기의 팽팽한 갈등

​그 무렵, 우리 집에 새로운 어머니가 오셨습니다. 한창 예민하고 감수성 풍부한 학창 시절을 보내던 우리 세 자매에게 '새엄마'라는 존재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거대한 벽과 같았습니다. 

어린 마음에 엄마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 자리를 대신하려는 분을 보니, 공연히 마음이 엇나가고 서운한 감정이 앞섰습니다.

​사소한 생활 습관부터 가치관의 차이까지, 집안에는 매일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새어머니 입장에서도 8남매나 되는 남의 자식을 거두는 일이 결코 쉽지 않으셨을 텐데, 당시 사춘기였던 저희는 그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밥상머리에서의 작은 꾸중도 서럽게만 들렸고, 때로는 날 선 갈등으로 이어지며 집안 분위기는 차갑게 얼어붙곤 했습니다.

​중간에서 애태우던 아버지의 고단한 뒷모습

​지금 돌이켜보니 그 시절 가장 마음고생이 심하셨던 분은 다름 아닌 우리 아버지였습니다.

 딸들이 새엄마와 친딸처럼 화목하게 지내길 간절히 바라셨던 아버지는, 양쪽 사이에서 눈치를 보느라 집에서도 마음 편히 쉬지 못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딸들에게는 엄마 없는 설움이 깊을까 봐 큰 소리로 야단 한 번 치지 못하셨습니다. 

혹여나 야단을 치면 '엄마가 없어서 아버지가 변했다'고 생각할까 봐 늘 미안한 마음을 품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생스러운 8남매 살림을 기꺼이 맡아준 새어머니에게 고마움과 안쓰러움을 동시에 느끼셨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두 갈래 마음 사이에서 매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계셨던 셈입니다.

​마루 끝에 남겨진 아버지의 깊은 한숨과 눈물

​우리가 학교 갈 준비로 바쁘게 움직이며 가방을 챙길 때면, 아버지는 늘 마루 끝에 앉아 먼 산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곤 하셨습니다. "휴우-" 하고 가슴 깊은 곳에서 끌어 올려진 그 무거운 한숨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그때는 그저 아버지가 농사일이 힘드셔서 기운이 없으신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모진 풍파를 다 겪고 예순이 된 지금에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 한숨은 자식과 아내 사이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한 남자의 눈물 섞인 기도였다는 것을요. 35년 자영업을 하며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애써온 지금의 제 모습이 투영되니, 아버지의 그 무거운 어깨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가슴이 아려옵니다.

​이제야 안아드리고 싶은 아버지의 청춘

​여러분에게 아버지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계시나요? 엄격한 호랑이 선생님 같으셨나요, 아니면 한없이 인자한 분이셨나요? 저에게 아버지는 마루 끝에 앉아 한숨을 내쉬던 뒷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뒷모습에 담긴 진심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것 같아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이제는 제가 그때의 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들어보니, 아버지가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오늘 밤에는 꿈속에서라도 마루 끝에 앉아 계신 아버지의 등 뒤로 다가가 "아버지, 그때 참 고생 많으셨어요"라고 따뜻하게 안아드리고 싶습니다.


[그리운 부모님]하얀 두루마기에 밴 아버지의 판소리와 쓴 술 한 잔


​하얀 두루마기에 밴 아버지의 판소리와 쓴 술 한 잔

​살다 보면 문득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며 떠오르는 얼굴이 있습니다. 
제 인생의 커다란 뿌리이자, 여덟 남매라는 거친 가지들을 묵묵히 지탱해 주셨던 나의 아버지입니다. 35년 자영업의 길을 걷는 지금, 문득 그 시절 아버지의 고단했던 어깨가 떠올라 마음의 기록을 남겨봅니다.

​장사익의 소리로 깨어난 아버지의 기억

​얼마 전 유튜브에서 장사익 선생님의 공연을 보았습니다. 
정갈한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무대 위에서 온몸으로 소리를 쏟아내는 그분의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순간, 저는 그대로 멈춰 서서 한참을 울고 말았습니다. 
그 절절한 소리와 휘날리는 옷자락이 자꾸만 저의 아버지를 불러냈기 때문입니다.

​마을의 소리꾼, 그러나 홀로 남겨진 외로운 기둥

​사실 아버지는 마을에 제사가 있거나 큰일이 생길 때면 하얀 두루마기를 정갈하게 차려입으시고 멋드러지게 판소리를 뽑으시던 소리꾼이셨습니다. 
마을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소리를 하시던 그 기개 높은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하지만 제가 일곱 살 되던 해, 엄마가 세상을 떠나신 후 아버지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줄줄이 딸린 여덟 아이를 홀로 책임져야 하는 외로운 기둥이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과 여덟 남매를 먹여 살려야 하는 막막함. 그 무거운 삶의 무게를 아버지는 술로 견뎌내셨습니다.

​술을 못 하시던 분이 배운 '쓴 잔'의 의미

​우리 남매들은 체질적으로 술을 전혀 못 마십니다.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금세 붉어지는데, 이것도 아버지를 꼭 닮았습니다. 평생 술을 멀리하셨다던 아버지가 엄마를 보내신 후 뒤늦게 술을 배우신 것도, 아마 맨정신으로는 그 적막한 집안과 고단한 삶을 견뎌낼 재간이 없으셨기 때문이겠지요.

​아버지는 저녁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낮은 목소리를 빌려 무언가를 자주 읊조리셨습니다. 
어린 마음엔 그저 노래인 줄 알았는데,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것은 차마 밖으로 뱉지 못한 가장의 한숨이었고, 먼저 떠난 아내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이었습니다.
장사익의 소리를 들으며 떠올린 아버지의 뒷모습. 정갈한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마을의 큰일을 도맡아 판소리를 하시던 아버지의 기개와 고독을 담아낸 이미지입니다."

​대를 이어 흐르는 하얀 두루마기의 정신







​세월이 흘러 이제 아버지는 계시지 않지만, 명절이나 제사가 돌아오면 저는 다시 아버지를 만납니다. 아버지가 그토록 아끼시던 그 하얀 두루마기를 이제는 저의 오빠가 물려받아 정성스레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루마기를 입고 제례를 올리는 오빠의 뒷모습에서, 저는 마을을 호령하던 소리꾼 아버지와 쓴 술 한 잔에 눈물을 삼키던 고독한 아버지를 동시에 봅니다. 사춘기 시절 새어머니와의 갈등 속에서도 묵묵히 우리 여덟 남매를 지켜주셨던 그 강인하고도 외로웠던 뒷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보고 싶어집니다.

[인생이야기] 한 달을 기다려야 맛보는 울진의 보물, 삭힌 감자떡의 진한 추억

[인생이야기] 한 달을 기다려야 맛보는 울진의 보물, 삭힌 감자떡의 진한 추억

안녕하세요. 35년째 자영업의 길을 걷고 있는 베테랑 장사꾼입니다. 오늘은 제 고향 울진에서 어릴 적 먹던, 요즘 분들은 잘 모르는 '진짜 삭힌 감자떡'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요즘 시중에서 파는 투명하고 쫄깃한 감자떡과는 차원이 다른, 시간과 정성이 빚어낸 눈물겨운 음식이지요.

1. 소금기 머금은 모래밭이 키워낸 울진 감자의 자부심

제 고향 울진, 우리 집 근처는 옛날부터 소금을 만들던 염전 밭이 많았습니다. 땅에 모래가 많이 섞여 있어서 그런지, 거기서 자란 감자는 유독 씨알이 굵고 맛이 좋기로 유명했지요. 감자 농사가 끝나고 고구마도 심어봤지만, 역시 그 땅에는 감자가 최고였습니다.

거친 바닷바람과 모래밭의 척박함을 이겨내고 자란 그 포슬포슬한 감자는 우리 8남매의 가장 든든한 양식이 되어주었습니다. 지금도 시장에서 감자를 볼 때면, 그 시절 울진 모래밭에서 갓 캐낸 흙 묻은 감자의 고소한 향이 코끝을 스칩니다.

2. 지독한 냄새를 견뎌야 얻는 백설 같은 '삭힌 녹말 가루'

감자떡을 만드는 과정은 그야말로 인내와 고난의 연속입니다. 요즘처럼 기계로 뚝딱 만드는 게 아닙니다.

  • 삭히기: 감자를 캐서 씨알이 잘은 것들을 골라 도랑가 커다란 단지에 담습니다. 그리고 20일에서 한 달 정도를 푹 썩힙니다.

  • 으깨기와 거르기: 적당히 썩으면 발로 밟아 으깨는데, 이때 나는 냄새가 정말 지독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을 거쳐야 껍질을 걸러내고 순수한 녹말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일주일간의 정성: 가라앉은 녹말을 매일 새 물로 갈아주며, 하루에 적어도 5~6번, 많으면 10번 정도를 일주일 내내 깨끗이 씻어냅니다. 지독했던 냄새가 사라질 때까지 반복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 말리기: 냄새가 사라지면 고운 채에 받쳐 명주보자기에 올리고, 햇볕에 며칠을 바짝 말립니다. 새하얀 녹말가루를 말리며 덩어리진 것을 부시고 있노라면,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나는데 그 감촉이 글을 쓰는 지금도 손끝에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3. 세 개의 가마솥과 양대콩 소가 빚어낸 고향의 맛

그렇게 힘들게 만든 가루를 뜨거운 물에 익반죽해서 손으로 조물조물 빚습니다. 그 안에는 설탕물에 절인 양대콩을 소로 듬뿍 넣어 먹었지요. 여름만 되면 도랑가에는 집집마다 감자 삭히는 단지가 3~4개씩 줄을 지어 있었습니다. 동네 전체에 냄새는 좀 났지만, 그렇게 만들어 놓은 감자가루는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우리 8남매의 가장 든든한 별미였습니다.

우리 집 부엌에는 가마솥이 세 개나 나란히 걸려 있었어요. 제일 큰 것은 소 죽 끓이는 용도였고, 중간 솥은 감자떡을 찌거나 국을 끓였으며, 제일 작은 솥은 밥을 지었지요. 깔끔하셨던 새엄마 덕분에 가마솥은 언제나 반들반들 윤이 났습니다. 소나무 장작불로 달궈진 중간 가마솥에 볏짚을 깔고 쪄낸 삭힌 감자떡은 요즘 것들과 달리 색이 진하고 식감이 묵직했습니다. 그 구수하고 깊은 맛은 한 달의 기다림을 보상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4. 정성이 빚어낸 인생의 맛

편하게 사 먹는 요즘 음식도 좋지만, 가끔은 한 달을 기다려 얻은 그 진한 감자떡 맛이 사무치게 그리워집니다. 8남매를 위해 그 지독한 냄새와 고된 과정을 묵묵히 견디셨던 어른들의 정성이 이제야 제 자영업 35년 인생의 밑거름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지독한 냄새(고난)를 견디고 수없이 씻어내는(노력)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저는 저 삭힌 감자떡을 보며 배웠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에게도 인생의 쓴맛 뒤에 찾아온 달콤한 추억의 음식이 있으신가요?

[인생 이야기] 내가 우리 집의 살림꾼이 되었던 이유

나의 사춘기 시절을 떠올려 보면 늘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여덟 남매 중 일곱째인 나는 위로 언니들이 시집을 가고 나자, 다섯째 언니와 막내 동생과 함께 살았다.

​언니는 얼굴이 예쁘고 몸이 여리여리해서 항상 예쁨을 받았고, 막내는 말 그대로 막내라 가족들의 귀함과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 중간에 낀 나는 조금 애매한 위치였다. 그래서였을까, 새어머니는 집안의 온갖 궂은일을 항상 나에게 시키셨다.

​아버지가 새벽에 초망(투망)을 치러 나가시면, 나는 엄마 대신 가마솥에 불을 지펴 소죽을 끓이고 가족들 먹을 밥을 했다. 밥만 한 게 아니었다. 아버지 대신 무거운 자전거를 타고 논에 가서 물을 대는 일도 내 몫이었다.

​겨울이라고 쉴 수도 없었다. 수도 펌프가 얼면 뜨거운 물을 부어 녹여가며 그 찬물에 산더미 같은 빨래를 하곤 했다. 사춘기 소녀가 하기엔 힘든 일들이었지만, 나는 싫은 내색 없이 그 일들을 척척 해냈다.

​그럴 때마다 옆집 할머니가 우리 집에 자주 오셔서 나를 가만히 보시곤 했다. 할머니는 그런 내가 가여웠던지 항상 이런 말씀을 하셨다.
니가 이 집 업(業)이다.”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냥 하시는 말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와 돌아보니 내 인생에 유난히 굴곡이 많은 이유가, 어쩌면 그때부터 모든 짐을 혼자 짊어지는 법을 배워버렸기 때문인가 싶기도 하다.

​남들이 시키는 일, 힘든 일 마다하지 않고 척척 해내며 살았던 그 시절. 그 서러웠던 고생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밑거름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한 것 같다.

"가끔은 생각한다. 그때 거절하지 못하고 그저 묵묵하게 해냈던 나의 성실함이 지금의 굴곡진 인생을 만든 걸까 하고. 내가 내 팔자를 스스로 그렇게 만든 건가 싶어 마음이 헛헛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시절 가마솥 불을 지피던 단단한 마음이 없었다면, 나는 내게 닥친 이 수많은 고비들을 60평생  여기까지 끌고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인생 이야기] 내 고향 염전 바닷가, 우리를 키운 구기자 울타리

[인생 이야기]  내 고향 염전 바닷가, 우리를 키운 구기자 울타리

살다 보면 문득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며 떠오르는 풍경이 있습니다.
 제 고향 동네는 옛날부터 소금을 만들었다고 해서 '염전'이라 불렸습니다.
 하지만 제 기억 속의 그곳은 짭조름한 바다 냄새보다, 집 앞 언덕에서 풍기던 싱그러운 풀 냄새와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더 짙게 남아있습니다
내고향 염전바닷가

집 앞 언덕에 서면 끝없이 펼쳐지던 고향 염전의 바다입니다. 짭조름한 바다 내음과 함께 거친 파도를 막아주던 구기자 울타리 너머로 보이던 이 풍경이, 35년 장사 인생을 버티게 한 제 마음의 안식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천연 미끄럼틀

우리 집 앞에는 커다란 언덕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언덕은 우리 남매들과 동네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멋진 **'천연 미끄럼틀'**이었지요. 
옷이 해지는 줄도 모르고 엉덩이를 붙이고 내려오던 그 언덕은 매일매일이 축제였던 우리들의 놀이터였습니다.

​집 옆으로는 'ㄷ'자 모양으로 굽은 언덕이 마치 우리 집을 포근하게 감싸 안은 '천연 요새' 같았습니다
그 언덕 위에는 구기자나무가 울타리처럼 자라나 거친 바닷바람과 집어삼킬 듯 밀려오는 뒤파도를 든든하게 막아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 8남매는 그 품 안에서 안심하고 잠들 수 있었습니다.

​봄의 전령사, 구기자 어린순 나물

​봄이면 어머니와 형제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울타리에 돋아나는 구기자 어린순을 뜯었습니다. 
쌉싸름하면서도 달큰했던 그 봄의 맛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쑥을 뜯고 달래와 냉이를 캐러 바구니(둥질이)를 메고 다니던 기억도 아련하지만, 구기자 울타리 덕분에 봄 내내 반찬 걱정 없이 마음껏 먹었던 구기자 나물은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보약이었습니다.

​가을이 깊어지면 초록색 울타리는 어느새 빨간 구기자 열매로 알록달록 물들었습니다. 보석처럼 빛나던 그 빨간 열매들은 리 고향 집을 참 예쁘게도 장식해 주었지요.

봄의 전령사, 구기자 어린순 나물

구기자어린순 나물

봄날의 보약, 쌉싸름하고 달큰한 구기자 어린순 나물입니다. 우리 8남매가 어린 시절 이 나물을 먹고 자라 지금까지 건강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고향 집 울타리에서 갓 뜯어온 듯 싱그러운 초록빛을 보니 다시금 어머니의 손맛이 그리워집니다
               

봄이면 어머니와 형제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울타리에 돋아나는 구기자 어린순을 뜯었습니다. 
쌉싸름하면서도 달큰했던 그 봄의 맛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쑥을 뜯고 달래와 냉이를 캐러 바구니(둥질이)를 메고 다니던 기억도 아련하지만, 구기자 울타리 덕분에 봄 내내 반찬 걱정 없이 마음껏 먹었던 구기자 나물은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보약이었습니다.

​가을이 깊어지면 초록색 울타리는 어느새 빨간 구기자 열매로 알록달록 물들었습니다. 보석처럼 빛나던 그 빨간 열매들은 우리 고향 집을 참 예쁘게도 장식해 주었지요.

​8남매 건강의 비결은 고향의 자연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면 팔순이 되신 큰언니를 비롯해 우리 8남매가 이렇게 건강한 것은 공기 좋고 물 맑은 고향 염전의 기운과, 그 구기자 나물 덕분인 것 같습니다.

​올해 제가 육십 대 초반이 되어 돌아보니, 그 척박한 바닷가에서 우리를 지켜준 건 화려한 무엇이 아니라 집을 감싸 안았던 언덕과 소박한 나물 한 접시였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잊지 못할 아련한 고향의 추억이 있으신가요?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제 마음속에 선명한 고향 집 에피소드들은 앞으로도 하나씩 꺼내어보려 합니다.

우리 가족의 건강 비결, 구기자순의 효능

​제가 어릴 적 보약처럼 먹었던 구기자 어린순은 단순히 맛있는 나물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구기자순에는 우리 몸에 좋은 성분들이 가득하다고 해요.

1.기력 회복과 면역력 강화: '진액을 보충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예로부터 기력을 보충하는 데 으뜸으로 쳤습니다.
2. ​간 건강과 피로 해소: 베타인 성분이 풍부해 간 기능을 돕고 지친 몸의 피로를 풀어주는 데 탁월합니다.
3. ​혈관 건강: 루틴 성분이 들어있어 혈관을 튼튼하게 하고 혈압을 조절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8남매가 튼튼하게 자라고, 큰언니가 팔순이 넘으신 지금까지 건강하신 이유가 바로 이 작고 소박한 나물 속에 담겨 있었던 것이지요.

[인생 이야기] 바다가 막아준 은빛 썰매장, 그 위를 달리던 철사 썰매

지난 포스팅에서 여름날 냇가 이야기를 하며 잠시 행복했었는데, 오늘은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고향의 겨울 이야기를 꺼내 보려 합니다.


자연이 선물한 천연 썰매장, 모래톱의 마법

​우리 고향의 겨울은 참 신비로웠습니다. 겨울이면 동해의 거센 파도가 모래를 밀어 올려 강어귀에 거대한 모래톱을 쌓았지요. 
그렇게 쌓인 모래 성벽이 강물을 꽉 막아버리면, 바다로 가지 못한 강물은 갈 곳을 잃고 마을 앞 넓은 논바닥으로 흘러들어 넘쳐났습니다.

​그 물들이 꽁꽁 얼어붙으면 평범했던 논은 순식간에 세상에서 가장 넓은 은빛 썰매장으로 변했습니다. 
인공적으로 만든 스케이트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대자연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었지요.
​그 시절 우리는 썰매를 사서 타지 않았습니다. 나무판자를 구해와 그 밑에 굵은 철사를 정성껏 구부려 탕탕 박아 만든 우리만의 수제 썰매였지요.​

각자 자기 손때 묻은 썰매를 끌고 나와 송곳으로 얼음을 힘껏 찍으며 달리면, 굵은 철사가 얼음판을 긁는 ‘촤악- 촤악-’ 소리가 온 들판에 경쾌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하하호호  떼지어서 신나게 놀다보면 어느새 땅거미가 지고 밥먹으러 오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에서 저는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우리가 부대끼며 살던 집터는 이제 번듯한 공원이 되어버려 흔적도 없는데, 우리가 썰매를 타던 그 논만은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저를 맞이해주더군요.

​논은 그대로인데, 함께 썰매 타던 친구들도 우리를 부르던 언니들의 목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습니다. 
사라진 마을터를 바라보며 저는 오늘도 기억 속의 철사 썰매를 타고 그 은빛 논바닥을 힘차게 달려봅니다.

여러분의 기억 속에도 이제는 사라져버린 고향의 풍경이 있나요?
 철사 썰매를 타고 달리던 그 찬 공기와  추워서 꽁꽁 언 손을 호호불며  장작불로 몸을 녹이며 놀던  그리운 친구들도 생각나는 밤입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추억도 댓글로 나누어주세요.
다음에는 내고향 봄의 정경들도 들려드리겠습니다 


[인생 이야기]멍석 위 흑백 TV에서 첫 아이스크림의 달콤함까지: 우리 집 문명 상륙기

1. 전기가 들어오고, 어둠이 걷히던 날
​제가 일곱 살 되던 해, 엄마는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 
8남매 중 일곱째인 저와 어린 동생들에게 엄마의 빈자리는 집안 가득 고인 어둠 같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마을에도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호롱불 밑에서 그림자놀이를 하던 밤들이 가고, 천장에 매달린 알전구가 눈이 부시게 빛나던 그날의 설렘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전기는 적막했던 우리 집뿐만 아니라, 어린 세 자매의 마음에도 작은 빛을 비춰주는 것 같았습니다.

2. 남의 집 마당, 멍석 위에서 배운 부러움
​전기가 들어오고 얼마 뒤, 마을 부잣집에 흑백 텔레비전이 들어왔습니다. 
저녁만 되면 우리 막내 세 자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안방은 이미 어른들로 꽉 차서 발 디딜 틈도 없었지요.
​주인집 아주머니는 마당에 커다란 멍석을 펴주셨습니다. 
우리는 밤이슬이 내려 옷이 눅눅해지는 줄도 모르고 그 멍석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습니다.
 쑥 연기 피워 올리며 모기를 쫓던 여름밤, 흑백 화면 속 김일 선수의 박치기 한 방에 온 동네가 떠나가라 함성을 지를 때면, 엄마 없는 서러움도 잠시 잊은 채 까르르 웃곤 했습니다.

3. 우리 집 안방이 동네 사랑방 된 날
​남의 집 멍석 위를 기웃거리던 우리 세 자매에게 드디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장성한 언니들이 돈을 모아 우리 집에도 텔레비전을 사 온 것입니다! 
더 이상 밤이슬 맞으며 남의 집 마당에 앉아 있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안방 대자로 누워 TV를 볼 수 있게 된 날, 우리 세 자매는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우리 집 안방은 동네 사람들이 모여드는 새로운 사랑방이 되었습니다. 
늘 부러워만 하던 우리가 처음으로 '나누는 기쁨'을 알게 된 소중한 시절이었습니다.

4. 뒤이어 찾아온 또 하나의 기적, 냉장고
​TV의 즐거움에 한창 빠져 지내던 시간들이 흐르고, 언니들은 또 하나의 큰 선물을 들고 왔습니다. 
바로 냉장고였습니다. TV만큼이나 신기했던 그 하얀 가전제품은 우리 삶을 또 한 번 바꿔놓았습니다.
​냉동실 문을 열면 쏟아져 나오던 신비로운 하얀 냉기, 그리고 그 속에서 처음 꺼내 먹었던 아이스크림. 입안에 넣는 순간 혀끝이 짜릿할 정도로 차가웠지만, 이내 사르르 녹으며 온몸으로 퍼지던 그 달콤함은 일곱 살 엄마를 잃은 뒤 제가 맛본 가장 따뜻한 위로였습니다.

​5. 멍석 위에서 쌓아 올린 그리움
​이제는 손가락 하나로 전 세계를 보는 세상이 되었지만, 저는 가끔 그 시절 멍석 위 밤공기가 그립습니다.
 비록 엄마는 곁에 없었지만, 서로의 체온을 나누던 세 자매와 동생들을 위해 땀 흘린 언니들의 사랑이 있었기에 외롭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꺼내 마실 때면, 그 시절 우리 세 자매가 나누어 먹던 달콤한 아이스크림과 따뜻했던 그 마당의 풍경이 떠오르곤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어린 시절,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던 귀한 물건이나 잊지 못할 첫 맛의 기억이 있으신지요? 
저처럼 멍석 위에 앉아 텔레비전을 구경하던 그리운 밤들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잠시 그때의 순수했던 설렘을 떠올려보시는 하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추억도 댓글로 나누어 주세요. 함께 추억하며 마음이 따뜻해졌으면 합니다."


[인생 이야기] 사라진 나의 낙원, 그곳에 머물던 여름

오늘은 나의고향이야기를 해볼까합니다

​지금은 **'환경엑스포공원'**이라는 반듯한 이름으로 불리는 곳. 
사람들은 깔끔하게 잘 닦인 산책로와 화려한 전시관을 보며 감탄하지만, 내 눈에는 그 너머의 풍경이 겹쳐 보입니다. 

내 기억 속의 그곳은 인공적인 공원이 아니라, 앞에는 끝없는 벌판이, 뒤에는 서늘한 바다가, 그리고 양옆으로는 생명력 넘치는 강물이 흐르던 '나의 낙원'이었습니다.

​학교 종소리가 멈추고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내 일과는 소를 몰고 나가는 것으로 시작됐습니다. 
어른들은 소 꼴을 먹이러 가라고 하셨지만, 우리에겐 그 시간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놀이 시간이었지요.

​강가 너른 풀밭에 소들을 대충 풀어놓으면 소들은 알아서 느릿느릿 풀을 뜯었습니다. 그 평화로운 광경을 뒤로하고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강물로 뛰어들었습니다.
 햇살에 달궈진 피부가 차가운 강물에 닿을 때의 그 짜릿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입술이 파래질 때까지 자맥질을 하고, 서로 물을 튀기며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배꼽시계가 울릴 때쯤이면 우리는 '강가 식당'을 차렸습니다. 
집에서 몰래 챙겨온 쌀을 찌그러진 깡통에 담고, 강 주변의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지폈습니다. 
반찬이라고는 강바닥을 훑어 잡아낸 싱싱한 재첩이 전부였습니다.
 깡통 속에서 보글보글 밥이 익어가는 냄새가 강바람을 타고 퍼지면, 그 어떤 산해진미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갓 지은 깡통 밥에 재첩 몇 알 얹어 먹던 그 소박한 맛은 평생 잊지 못할 꿀맛이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강물이 붉게 타오를 때쯤이면, 강변의 매끄러운 돌들을 주워 공기놀이를 했습니다. 
"이제 집에 가야지!" 누군가 외치기 전까지 우리는 그 황금빛 풍경 속에서 하나가 되어 웃었습니다.

나의 고향, 그곳은 제2의 우포늪이었습니다

                        우포늪전경
 ​이 이야기는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가 아닌, 8남매 중 일곱째로 자란 저의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소중한 경험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생태계의 보고라며 찾는 우포늪이나 순천만을 볼 때면, 저는 엑스포 공원 아스팔트 아래 묻혀버린 제 고향 강변이 떠올라 가슴 한구석이 아련해지곤 합니다.

1.자연이 선사한 천연 간식: 해당화와 찔레의 가치
​지금은 보호구역에서나 볼 수 있는 식물들이 그 시절엔 우리의 훌륭한 주전부리였습니다.
            (우리가 따먹던 해당화열매)

​해당화 열매: 붉게 익은 해당화 씨를 발라 먹을 때의 그 독특한 풍미는 자연이 준 천연 비타민이었습니다.

(찔레꽃:  꽃피기전  어린순을 먹을수있다)

​찔레꽃대: 봄철 연한 찔레꽃대의 껍질을 까먹던 기억은 배고픔을 달래주던 달큰한 추억이자, 자연의 생명력을 직접 섭취하던 소중한 순간이었습니다.

​2. 살아있는 생태 체험: 말동구리와 개구리 사냥

​장난감이 귀하던 시절, 강가는 거대한 자연 학습장이었습니다.
​말동구리(소똥구리): 소들의 워낭소리를 따라다니며 말동구리가 경이롭게 굴리던 경치를 지켜보는 것은 아이들에게 최고의 관찰 놀이였습니다.

​개구리 구이: 직접 잡은 개구리를 모닥불에 구워 먹던 경험은 원초적인 생존 본능과 자연의 맛을 동시에 일깨워준 개인적인 식문화 체험이기도 했습니다.

3. 환경 변화와 기록의 중요성: 나의 개인적 소견
​현재 고향의 강변은 엑스포 공원의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으로 덮여 옛 모습을 찾기 어렵습니다. 
도시 개발은 우리에게 편리함을 주었지만, 그 과정에서 소중한 자연 습지생태계가 사라진 점은 개인적으로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하지만 장소는 변해도 그 안에서 얻은 생명에 대한 존중과 강인한 정신력은 제 인생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개인적 기록을 남기는 이유는, 우리가 잃어버린 자연의 가치를 되새기고 정서적 회복을 돕는 '마음의 이정표'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인생이야기: 입덧 속에 치러진 상가 계약, 35년 전 그날의 서글픈 풍경

  인생이야기: 입덧 속에 치러진 상가 계약, 35년 전 그날의 서글픈 풍경 첫째 때부터 이어진 장사, 그리고 입덧과 함께 찾아온 둘째 저는 첫째 아이를 키울 때부터 이미 장사 전선에 뛰어들어 쉼 없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홈패션 가게를 꾸려가며 8남...